고대 로마의 황제들은 유대 속주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전체 로마 사회에도 많은 영향을 준 지역이기도 하였습니다. 로마가 관심을 가진 첫 번째 사건으로 시리아 속주를 설립한 제3차 미트리다틱 전쟁이 끝난 기원전 63년에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약탈하면서 시작되었는데요 몇 년 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안티파스 혹은 안티파테르라고 알려진 이두매인을 최초로 로마 총독을 임명하게 됩니다. 이후 그의 아들이 로마 원로원에 의해서 약 40여 년간 유대 지역의 군사적 통제권을 얻게 되었지만 결국 죽게 되고 아들들에 의해 분할되어 통치되게 됩니다. 이후 헤롯 아르켈라오스의 무능함으로 다시 한번 유대 지역에 반란이 일어나는데요 결국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그의 직위에서 해제되고 로마의 직접 관리로 바뀌게 됩니다. 정말 오랜 기간 반란과 자치권 임명 및 분할이 반복되다가 결국에는 유대인들을 그 지역에서 해산하기에 으르는데요 그 과정에서 기원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과 성전 파괴 후 약탈하는 과정은 로마 시대에도 인상적인 일로 남겨졌는지 티투스 개선문을 세워 당시의 일을 기리기도 하였습니다. 투어를 하면서 유대 속주와 관련해서 유물도 함께 찾아보시죠.
지난 3부에서 마지막에 보았던 파우스티나 더 영거 흉상 왼쪽 코너로 벽장들이 있는 복도가 있는데요 이 복도의 일부 벽장은 로마 통치하에 북아프리카 유물들을 소개하고 있는데요 그 안에 있는 유물부터 보러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정면에 석비가 보이는데요 이 석비는 타니트(Tanit) 여신을 위한 석비입니다. 아래에 보면 한 남자가 공물을 들고 있는 형상이 보이고 위에 보면 뭔가 흐느적거리는 사람과 같은 형상 위에 태양이 보이는데요 아래 흐느적거리는 모습의 형상이 타니트 여신입니다. 이 여신은 카르타고의 주요 신인데요 바빌로니아의 주요 신인 이슈타르 혹은 아스도렛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산의 상징이고 바알 함몬(암몬)의 배우자이며 오랜 기간 숭배되어온 신인데요 카르타고에서는 자녀 희생을 바칠 때 이 신을 위해 바쳤습니다. 최근에는 수만 명의 어린아이들을 이 신을 위해 바쳐진 것으로 발굴이 되었는데요 정말 끔찍하네요. 로마 역사가 디오도루스(Diodorus)는 카르타고의 지배층에서 첫 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 관습이었음을 알렸는데요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200명을 공개적으로 제물로 바치고 구설이 있던 다른 아이들까지 모아서 최종적으로 300여 명의 아이가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제사의 관습은 이후 로마의 모든 지역에서 금지되면서 기원전 146년을 기점으로 카르타고를 비롯한 모든 곳에서 중단시키려 했지만 기원 3세기까지도 이러한 제사가 계속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복도를 따라 안으로 가면 왼쪽 벽장 가운데에 엽서 크기의 얇은 조각 같은 게 보이는데요 이 조각은 기원 1-2세기에 영국 북부 빈돌란다(Vindolanda)에서 발견된 로마 기록 보관소의 자료입니다. 로마 전역에는 이러한 기록 보관소가 존재했는데요 여기서 발견된 서판에는 공식적인 군사 문서는 물론이고 빈돌란다의 수비대 구성원과 그들의 가족, 노예들과 주고받은 개인적인 내용 역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서판의 내용에는 기원 100년경에 개최된 생일 파티 초대장도 있는데요 이것은 여성이 라틴어로 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서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서판은 현지에서 자란 자작나무, 오리나무, 참나무로 만들어졌고 일부 서판은 다른 지역에서 온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이러한 서판에는 로마 필기체로 작성되어서 로마 군대의 높은 문해력이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기록 보관소 가운데 주요 도시에는 원로원의 기록이 남아 있기도 했고 로마 시민권자의 이름과 태어난 날짜, 성별 등이 보관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기록은 인구조사를 해서 5년 동안 갱신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사본은 접히는 나무로 된 휴대용 글자판 증명서(신분증)에 적어서 지니고 다녔으며 이러한 신분증을 제출해서 법적 신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복도를 따라 나와서 반대편에도 있는 하드리아누스와 안티노우스 오른편의 복도를 따라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복도 안에는 유대 속주(Judaea)라는 벽장이 보이는데요 여기 가운데 벽장을 보면 윗부분을 보면 다양한 동전들이 보입니다. 1-9번을 순서대로 역사적 배경과 같이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번 동전은 헤롯 대왕 동전(Bronze Coin of Herod the Great)입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라 에돔에서 태어난 외국인이었는데요 그로 인해 유대인들은 헤롯을 싫어하였습니다. 헤롯은 유대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세우고 로마 군인들은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는 유대교 우대정책과 수도 시설 개선 사업을 하였습니다. 다마스쿠스, 안티오크, 로도스 등에 수많은 건물을 짓고 로마 극장과 원형경기장을 짓고 올림픽 경기를 주관하는 등 유대인 전통과는 맞지 않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는 로마 정치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유대의 왕으로 지위를 인정받고 다스렸는데요 그의 가정사는 끊임없는 의심과 모함 처형으로 얼룩졌었습니다. 성서 기록에도 등장하는데요 마태 2:1-23에서 베들레헴에서 있었던 어린아이들의 학살과 관련된 기록에 나오는 당사자입니다.
2번 동전은 필립 테트라크(Philip the Tetrarch)의 주화로 그가 4명의 공동 통치자 중 한 명이라는 의미입니다. 헤롯 대왕과 그의 다섯 번째 아내인 예루살렘의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데요 헤롯 안티파스의 이복형제였습니다. 그는 헤로디아와 헤롯 2세(헤롯 필립 1세)의 딸인 조카딸 살로메와 결혼하였습니다. 헤롯 대왕이 부인과 자녀가 많아서 가계도가 복잡한데요 그로 인해 각각의 다른 인물을 같은 사람으로 혼돈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도 성서에 나오는 인물인데요 마태 14:1-13과 마가 6:17-29에 나오는 침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한 여자가 필립 테트라크의 아내인 살로메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3번 동전은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의 통치 시대에 발행된 구리 합금으로 된 주화입니다. 빌라도는 헤롯 대왕의 아들인 아르켈라오스가 유대 지역의 통치자에서 물러나자 속주를 다스리도록 황제에 의해서 다섯 번째로 임명되었는데요 티베리우스는 기원 26년에 그를 임명해서 10년간 통치하였습니다. 그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지만 그의 이름이 들어간 비문이 1961년 카이사레아에서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필론과 같은 유대인 저술가는 빌라도를 완고하고 고집 센 사람으로 묘사하지만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는 전형적인 정치적인 인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의 말년에 대한 기록은 잘 안 나오는데요 역사가인 유세비우스는 칼리굴라 통치 기간 동안 모함에 몰려 자살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빌라도가 유명한 이유는 성서에서 예수의 재판과 관련된 기록에 나오기 때문인데요 마태복음 27:1-31과 마가복음 15:1-15; 누가복음 23:1-25; 요한복음 18:28-40; 19:1-16등 여러 구절들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4번 동전은 헤롯 아그리파 1세(Herod Agrippa I) 시절의 주화입니다. 그는 헤롯 대왕의 손자인데요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이며 마리암네 1세를 통해 얻은 아들입니다. 마리암네 1세는 대제사장 히르카누스 세의 외손녀인데요 아리스토불루스는 헤롯 대왕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아그리파는 그의 할아버지와 같이 팔레스타인 전역의 왕이 된 사람으로는 헤롯 가문의 마지막 인물이니다. 그는 로마에 있는 친구의 도움을 많이 얻게 되는데요 티베리우스 황제의 아들 드루수스와 황제의 조카 클라우디우스와 함께 로마에서 교육받으면서 로마인들 사이에 잘 알려진 인물이 됩니다. 하지만 극도로 낭비벽이 심하고 앞뒤 가리지 않는 성격으로 엄청난 빚을 지고 이두매로 도피하는데요 그의 누이 헤로디아와 아내 키프로스(헤롯 대왕의 조카딸)의 도움으로, 얼마간 티베리아스에 거주하게 됩니다. 그곳에서도 안티파스하고 사이가 틀어져 로마로 돌아가는데 그곳에서도 티베리우스와 관계가 악화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칼리굴라가 왕이 된 뒤에는 아그리파의 사망한 삼촌 빌립이 통치하는 영토를 받게 됩니다. 아그리파는 독실한 유대인 신자인 것처럼 행동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도 했는데요 사도행전 12:1-23의 사건에서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체포해 감금하기도 했으며 그의 죽음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세푸스는 아그리파의 말년 당시의 모습을 기록하였는데 마지막 연설에서 전부 은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으며 죽을 때는 심한 복통을 앓았는데 극심한 통증이 갑자기 생겨 닷새 후에 죽었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5번 주화는 유대 속주 정복(Judaea capta) 주화로 불리는 동전인데요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가 1차 유대 반란 기간동안 70년 그의 아들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발항한 일종의 기념주화입니다. 주화에는 여러 가지 변형이 있는데요 지금 영국 박물관에 있는 주화에는 야자수 왼쪽으로 유대인이 포박되어 앉아 있고 오른쪽 포로는 서 있는 모습으로 되어 있습니다. 주화에는 ‘정복된 유대 속주’(Judaea Capta) 혹은 드물게는 ‘패배한 유대 속주’(Judaea Devicta) 등으로 되어 있기도 하였습니다. 이 기념주화는 베스파시아누스 이후에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까지 25년 동안이나 48가지 종류로 주조되었으며 청동, 은, 금으로 발행되었습니다.
6번 주화는 네르바의 세스테르티우스(Sestertius of Nerva) 주화입니다. 로마의 12대 황제인 네르바가 즉위한 기원 96년에 로마에서 주조된 동전인데요 로마와 유대인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증거로 간주되는 동전입니다. 이 동전의 뒷면에는 유대 지방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는 야자수가 그려져 있고 FISCI IUDAICI CALUMNIA SUBLATA라는 글이 쓰여 있습니다. 정확한 번역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지만 유대인 업무를 처리하는 재무부로 해석되고 있는데요 오랜 기간 플라비우스 왕조와 유대인 공동체와는 사이가 안 좋았지만 네르바는 그들을 차별 대우하지 않고 제국 전체의 지지를 받기 위한 관대한 행위로써 그들의 과세 부담을 경감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해석과 일치하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7번 동전은 1차 유대 반란 기간 동안 성전세를 내는 데 사용된 세겔(Shekel:기원66-67)로 사용된 동전입니다. 이 동전의 앞면에는 의식용 성배가 그려져 있고 히브리어로 반세겔(Chatzi HaShekel)이라 적혀 있고 뒷면에는 석류 싹이 세 개 있는 지팡이가 그려져 있고 히브리어로 예루살렘 성지(Yerushalayim HaKedosha)라고 되어 있습니다.
8번 동전은 하드리아누스(Hadrianus:130-138) 세스테티우스라 불리는 유대 속주 방문 기념주화인데요 하드리아누스는 이집트, 마케도니아 스페인 등 어디를 가든 기념주화를 발행하였습니다. 그가 유대를 방문했을 때는 세스테티우스에는 황제가 야자나무 가지를 든 유대인 여자와 두 아이를 만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희생 제단 옆에 황소가 나타나는 모습도 있습니다. 이 제단은 하드리아누스가 새로운 신전에 바친 카피톨리누스 신에 대한 언급을 하고자 하는데요 예루살렘을 카피톨리나(Capitolina)로 명칭을 바꾸기까지 하였습니다.
9번 주화는 제사장 엘르아살(Eleazar the Priest)이라는 이름으로 발행된 은 데나리온 주화입니다. 이 주화는 2차 반란의 지도자인 바르 코흐바가 발행하게 되는데요 이 시대(기원 132-135년)에는 성전이 없었기에 그들의 주권을 동전으로 표기해서 유통하였습니다. 성전 재건에 대한 희망과 유대인 상징과 함께 히브리어 비문을 찍어서 발행했는데요 처음 2년간은 이스라엘의 자유로 찍었으며 3년 차에는 예루살렘의 자유를 위하여라는 글로 바뀌었습니다. 특히 지금의 은화는 3년 차 은화인 것 같은데요 포도 덩굴이 그려져 있습니다. 2차 반란 동안 50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며 로마군 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베르타에서 바르 코흐바의 마지막 패배 후에는 그는 자결하였으며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노에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으며 예루살렘의 이름도 로마식으로 카피톨리나로 철저하게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중앙 복도로 나가서 70번 방 나가는 출구 왼쪽으로 보면 여러 장신구들이 보이는데요 고대 로마에서 착용했을 여러 유형의 화려한 목걸이나 반지 등이 보입니다. 가운데 큰 장식이 있는 목걸이를 목에 걸면 꽤나 무거웠을 거 같기도 합니다. 고대 로마의 제품은 숙련된 장인이 만든 제품들로 고대 그리스의 제품과는 조금 다른 점은 유색 보석과 유리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로마는 다양한 유형의 보석을 사회 계층에서 착용했는데요 미학적인 목적과 사회적 지위와 부를 메시지로 주기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순금과 은을 많이 사용하였지만 로마의 하층민들 역시 청동이나 기타 저렴한 금속으로 다양한 장신구를 만들었습니다. 금과 은은 아마도 부유한 사람들만 착용했을 텐데요 그리스 보석상과는 달르게 로마는 금형 주조 기술을 이용해서 대량 생산을 했고 더 많은 사람이 구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로마인들은 대중 앞에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기에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이제 그리스와 로마인의 삶(Greek and Roman life)이라는 69번 방으로 이동해 보겠습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왼편에 드라마(Drama)라고 되어 있는 글 아래 전시물이 있는데요 이 전시물은 고대 극장에서 사용되었던 가면들입니다. 이러한 가면의 특징은 다채롭고 표현력이 풍부한 느낌을 주고 있는데요 이러한 마스크는 정교하게 가공되었고 심지어 배우들의 음색을 강화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관객에게 배우의 감정을 쉽게 전달하기 위해서 감정을 과장 되게 표현하기도 했는데요 아래 보이는 두 마스크처럼 슬프거나 놀란 표정 혹은 애통하거나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위에 마스크는 멍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요 이런 가면은 코믹한 느낌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 속주를 보니 당시 참 혼란한 상황이었는데요 이런 상황에서 유대 지역에서는 그리스도교의 등장도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시간이 흘러서 변질된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로마의 종교를 혼합하여 국교로 삼게 됩니다. 이와 관련된 유물도 다음 5부에서 잠깐 소개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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