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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투어 / 영국 박물관(대영 박물관) - 로마편 3부

by 톡톡오늘 2022. 1. 10.

로마를 현대의 미국과 비교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고대에도 로마인이라고 하면 이탈리아 반도에 사는 라틴계 민족적 구성을 가진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까지 통틀어서 로마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민족이다 하더라도 로미 시민권을 얻으면 법적으로 로마인 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로마를 다민족 국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나중에는 이민족 취급을 했던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방의 트라키아 출신의 사람이나 아랍인들도 황제의 자리까지 오를 수가 있었습니다. 고대인데도 민족적 차별 없이 사람들을 대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는데요 이런 국가 정체성으로 인해서 오히려 로마가 오랜 기간 존속했던 이유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대중 매체는 로마인을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하기도 하지만 고대의 민족적 구성은 오히려 흑발의 갈색 눈을 가진 사람이 주류였고 이후에 게르만 민족의 유입으로 인해서 지금의 서양인을 떠오르게 하는 금발 푸른 눈의 인구가 점차 증가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지금은 흰색 흉상으로만 남아있는 초기 황제들 가운데 루키우스 베루스와 같은 인물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얼굴을 그렇게 상상해 보실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럼 박물관 투어를 계속해 보시죠.

트라야누스 오른쪽에 있는 유리 벽장을 보면 희한한 갑옷이 하나 보이는데요 이 갑옷은 기원 3세기에 이집트에서 악어로 만든 갑옷입니다. 이 갑옷에 대해 소개한 여러 자료들이 있는데요 유래를 보자면 이집트 속주가 로마제국의 일부가 되자 로마는 이집트 문화와 종교를 직접 접하게 되고 로마 수비대는 이집트 사람들의 지역 종교 활동에 참여하게 되는데요 이집트 중부 나일강 유역의 만팔루트(Manfalout) 주변에서 로마 군인들은 이 지역의 동굴에서 행해지던 악어 숭배에 특히 매료되게 됩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악어를 신성하게 여기고 신으로 숭배했기 때문에 악어 신의 영을 취하는 악어 종파의 제사장들이 이 옷을 입었을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에서는 악어가 무적의 동물로 여겨졌는데 이런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면 전사가 어떤 마법적인 방식으로 변형되어서 동물의 속성을 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 트라야누스 맞은편을 보면 두 명의 여자 흉상이 보이는데요 오른쪽은 살로니아 마타디아(Salonia Matidia)이고 왼쪽은 클라우디아 올림피아스(Claudia Olympias)입니다. 이 여자들의 머리 모양을 보면 신경을 많이 써서 땋아 올린 것처럼 보이는데요 머리 모양에 따라 시대를 알아볼 수도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머리 모양은 개인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중요한 표현 방법이었는데요 성별, 나이 사회적 지위, 재산 및 직업 등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서 결정되었습니다. 오른쪽의 살로니아 마타디아와 왼쪽의 클라우디아 올림피아스를 함께 보더라도 누가 더 신경 써서 머리를 가꾸었는지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신분의 차이를 떠나 당대 여성들은 머리 모양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요 이런 머리 양식을 위해 전문 미용사를 통해서 층을 올려서 풍부하게 만들어야 했고 시간과 비용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당대 많은 여성들이 가발을 쓰기도 염색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오른쪽의 살로니아 마타디아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면 그녀의 맞은편에 있는 트라야누스 황제가 외삼촌인데요 트라야누스는 자녀가 없었기에 그녀를 자신의 딸처럼 대하였습니다. 세 번의 결혼을 했는데 루시우스 비비우스 사비누스와 첫 번째 결혼했지만 몇 년 안되어 남편은 사망하고 첫 남편과의 딸인 비비아 사비나(Vibia Sabina)는 미래의 14대 황제가 되는 하드리아누스와 결혼하게 됩니다. 마티디아는 루시우스 민디우스라는 로마 귀족과 결혼했지만 1년 뒤 민디우스마저 죽게 되고 나중에 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와 결혼하여 파우스티나(Faustina)를 낳게 되는데요 그녀 역시 상원의원인 마르쿠스 아니우스 베루스와 결혼하게 되는데 손자가 16대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됩니다. 마티디아는 사후에 아우구스타(Augusta) 칭호를 받게 되고 신격화되어 최초로 남편이나 다른 신전에 함께 사용되는 것이 아닌 그녀의 이름으로 신전과 기념비, 비문을 새기게 됩니다.

왼쪽의 클라우디아 올림피아스는 아래에 글을 새겨서 소개가 되어 있는데요 티베리우스(황제 티베리우스가 아닙니다)의 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지중해 동부 출신으로 해방노예로서 자유인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비싼 조각가를 섭외하여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덧붙이자면 오크시우스 푸블리우스 에우티쿠스(이름으로 보면 해방노예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와 33년간의 결혼 생활 끝에 49세의 나이로 죽었음을 알려줍니다.

이제 중앙 복도를 따라 벽장 너머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부터는 생소한 인물들도 많이 나오는데요 주요 인물들과 어떻게 연관관계를 이루고 있는지 함께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가장 오른편에서부터 보면 안티노우스(Antinous)와 왼쪽에 14대 황제인 하드리아누스(Hadrianus)가 보입니다. 하드리아누스(기원 76-138년)부터 먼저 소개를 해야 할 거 같은데요 그는 오현제 중 한 명으로 트라야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함께 로마 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로 찬사를 받지만 의심스러운 즉위 과정과 네로를 연상시키는 지나친 예술에 대한 사랑으로 당대 로마인들에게는 비난도 많이 받았었습니다. 알렉산더가 제왕으로서 수염을 면도하는 유행을 시작하였는데요 하드리아누스는 다시 수염을 기른 최초의 황제였습니다. 그리스 문화에 심취했고 양성애자였기에 황후(비비아 사비나)가 있음에도 123년 클라우디오폴리스에서 만난 안티노우스라는 청년과도 사랑에 빠져 연인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옆에 있는 흉상인 안티노우스와는 연인 관계입니다. 제국을 순회할 때는 늘 안티노우스를 늘 데리고 다녔는데요 130년에 안티노우스는 나일강에 빠져 악어에 물려 죽게 되었다는 것이 공식적인 사인이긴 하지만 사인은 여러 의혹이 있기는 합니다. 하드리아누스는 안티노우스와 제국을 순회할 때 소아시아 지역에서 동성애를 죄악시하는 유대교에 대해 적대감이 강해져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방을 돌면서 할례를 금지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일로 유대인들은 대규모 반란(바르 코크바의 난)까지 일으키며 3차 유대-로마 전쟁으로 이어지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칙령을 내려서 그리스도인들을 사람들이 비난하더라도 로마 관리들은 관심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기도 했는데요 이 칙령에서는 합법적으로 고발하거나 어떠한 범죄 사실이 입증되지 않는 한 어떠한 그리스도인도 죽이지 않는 것이 그의 뜻이라고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다음 왼쪽에 있는 두 명은 부부 관계인데요 오른쪽은 파우스티나 더 엘더(Faustina the Elder)와 왼쪽은 15대 황제인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입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기원 86-161년) 역시 5현제 중 한 명으로 피우스는 경건한 자라는 뜻으로 원로원에서 준 존칭입니다. 선제인 하드리아누스의 정책을 잘 이어서 23년의 통치 기간 동안 전반적으로 평온하게 지냈던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행정가로서 경제와 사회 재건, 인프라 개발 등 다양한 내적 문제를 해결하였지만 국방비 절감으로 인하여 로마군의 전력이 약화되었다는 비판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안토니누스의 온화한 성격으로 주변의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던 인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안토니누스는 아내인 파우스티나를 사랑하는 애처가로 자처했지만 정작 아내는 기가 센 성격 탓에 속앓이를 많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파우스티나의 헤어스타일은 당대 로마 세계에서 인기를 끌기도 했는데요 2~3대에 걸쳐 유행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안토니누스 황제 시절 유스티누스(Justinus)라는 인물이 있었는데요 그리스 철학자였지만 그리스도교를 접하고 그리스도교를 탐구하고 개종했던 유스티누스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에게 편지를 보내서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기꺼이 세금을 납부한다고 하며 변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사망한 후에는 다른 그리스 철학 학파 사람들에 의해 위험 분자로 고발되어 사형되었는데요 그러한 일로 순교자 유스티누스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이제 맞은편에 있는 인물들로 가보겠습니다.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살펴보시죠.

왼쪽에 있는 남자는 160-17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여지며 그리스 아테네 웅변가의 초상입니다. 그의 오른쪽에 있는 인물은 헤로데스 아티쿠스(Herodes Atticus)라는 인물인데요 그는 그리스계 로마인으로서 정치인이자 소피스트(교사)이자 로마 원로원의 의원이었습니다.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의 스승이기도 했으며 건축 공학, 물 공급 시스템 설계 및 건설 등을 주도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귀족 가문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요 그리스와 로마의 최고의 교사들로부터 수사학(설득하고 연설하는 학문)과 철학을 교육받았었습니다. 그는 정치가로서도 일을 했었지만 자선가이자 공공 작품 및 여러 건축 프로젝트를 추진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는데요 그가 추진한 것들로는 전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아테네의 파나티나이크 경기장(Panathenaic Stadium), 오데온 음악당(Odeon), 고린도 극장 등 여러 건축들을 추진하였고 네로가 추진했다가 실패한 고린도 운하도 추진하려 했지만 결국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지금도 그리스나 이탈리아 여러 지역에서는 그가 추진했던 건축 작품들을 관람할 수 있습니다.

다음 오른쪽으로 조금더 가면 헤로데스 아티쿠스의 제자들인 왼쪽의 16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와 오른쪽의 동생이며 공동 황제였던 16대 황제인 루키우스 베루스(Lucius Verus)가 보입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기원 121-180년)는 그의 통치 기간 중에 로마가 가장 크게 확장했고 인구도 5,500만 명까지 증가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위기 속에서 묵묵히 자신을 불태우며 헌신한 명군으로 혹은 이상적인 황제상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그의 통치중에는 홍수나 화재, 지진, 폭동, 전쟁으로 얼룩졌고 그가 직접 군대를 지휘해서 출정하기도 했지만 돌아온 군인들이 치사적인 병을 옮겨와서 제국 전역의 많은 사람이 죽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종교심이 강한 인물이기도 했는데 그리스에서 5년마다 개최하는 엘리우스시스(Eleusinian) 종교 제전에 참석하기도 했으며 그의 승리를 묘사하는 제단의 양각을 보면 자신을 제단에서 봉사하는 사제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한 종교심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시종일관 박해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설치한 병영 기지에서 전염병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루키우스 베루스(130-169)는 형 마르쿠스(40세)의 요청에 따라 형 함께 31살의 나이로 공동 황제로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젊고 잘생긴 독신 황제였기에 인기도 상당했고 자부심도 많았으며 평범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른 39살의 나이에 갑자기 병을 얻고 죽게 되었습니다.

다음 오른쪽으로 조금 더 가면 두 여성의 흉상이 보이는데요 왼쪽은 파우스티나 더 영거(Faustina the Younger)이며 오른쪽 역시 파우스티나 혹은 그녀의 딸 아니아 루실라(Annia Lucilla)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파우스티나는 맞은편에 있는 15대 황제인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와 파우스티나 더 엘더(Faustina the Elder) 사이의 딸입니다.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내이기도 한데요 아루렐리우스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입양된 아들이었지만 로마 법에 따라서 남매는 결혼하게 됩니다. 파우스티나의 생애에 대한 로마 자료는 별로 없지만 남편과 함께 다양한 군사 작전에 동행했고 아우렐리우스는 그녀에게 캠프의 어머니(Mater Castrorum)라는 칭호를 주기도 하였습니다. 파우스티나의 딸인 아니아 루실라는 그녀의 두 번째 딸이었는데요 훗날 코모두스 황제의 누이가 됩니다. 루실라는 약 33살쯤에 코모두스의 암살 및 쿠데타 시도를 하는데요 실패한 후에는 카프리 섬으로 추방된 후 처형됩니다.

2부와 3부에서는 로마의 인물들에 대해 많이 살펴보았는데요 4부부터는 다른 유물들도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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