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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투어 / 영국 박물관(대영 박물관) - 메디아-페르시아 1부

by 톡톡오늘 2021. 12. 27.

이번 편에서는 메디아(Media)와 페르시아(Persian)가 함께 바빌로니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근동에서 약 200년간 전성기를 누린 아케메네스 제국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메디아와 페르시아는 서로 친척뻘이 되는 관계인데요 마치 한국의 고구려, 백제, 신라 혹은 더 정확한 관계로 보자면 부여와 고구려의 관계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초기 역사를 조금 살펴보자면 엘람 왕국이 아시리아에 멸망된 뒤에 테이스페스(Teispes) 왕자는 엘람의 도시였던 안잔(Anzan)을 점령하고 부친인 아케메네스(Achaemenes)의 이름을 딴 왕조를 세웠는데요 테이스페스 사후에 장남인 키루스(Cyrus)는 남부 지역(Persian)을 통치하고 차남인 아리아라메스(Ariarames)는 북부 지역(Media)을 통치하게 됩니다.

이후에 시간이 흘러서 페르시아를 통합한 키루스 1세(Cyrus Ⅰ)의 아들인 캄비세스 1세(Cambyses Ⅰ)와 메디아의 공주인 만다네(Mandane)와 결혼함으로 통합되고 아들인 키루스 2세(Cyrus Ⅱ)의 통치에서 바빌로니아 제국을 멸망시키고 제국을 이루게 됩니다. 따라서 제목은 메디아-페르시아편으로 되어 있지만 대부분은 ‘페르시아’로 통칭해서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간략하게 아케메네스 제국의 시작을 소개하였는데요 이제 유물들을 하나씩 보면서 더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페르시아 유물과 관련해서도 영국박물관에서는 구석구석을 잘 찾아다녀야 확인이 가능한데요 먼저 15번 방인 아테네와 리키아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15번 방 초입 왼쪽에 보면 고대 그리스 도자기와 함께 투구와 화살촉이 있는 벽장이 보입니다. 이 화살촉은 기원전 490년 아테네 군대가 아티카의 마라톤에서 페르시아 군대와 전쟁을 할 때 페르시아 군이 사용하던 화살촉입니다. 페르시아인들의 주요 무기는 활과 화살촉이었는데요 현장에서 발견된 청동 화살촉 가운데 큰 것은 페르시아(Persian) 군이 사용했고 작은 것은 페르시아 군대에 소속되어 있던 스키타이(Scythian) 군의 기마 궁수들이 사용하던 화살촉입니다. 그리스 학자인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사람들을 당대 가장 활을 잘 쏘는 사람들로 언급하는데요 그들은 5세부터 20세까지 활쏘기와 말타기를 배우고 말을 타면서도 능숙하게 활을 쏠 수가 있었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적에게 화살 세례를 퍼붓는 공격 방법이 페르시아군의 기본 전술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마라톤 전투에서는 아테네군 1만 명과 플라타이아이인(Plataea) 천 명을 끌고 15,000명의 페르시아 군을 중앙으로 포위해서 격파하였습니다. 이 전투로 페르시아 군은 6,400명이 전사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투가 사실 페르시아 제국의 입장에서는 의미 있는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스인들에는 엄청난 의미를 가져온 승리였습니다. 그리스 군이 페르시아 군을 이긴 첫 전투였기에 페르시아 군이 무적의 군대가 아니었고 저항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준 전투였습니다. 이제 다시 3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Great Court로 나가서 오른쪽에 있는 1번 계몽(Enlightenment) 방 뒤쪽으로 연결된 계단으로 올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3층으로 올라가는 중간에는 거대한 부조가 중간에 보이는데요 이란의 페르세폴리스에서 가져온 궁전 출입구 부조입니다. 이 부조의 주인공은 아마도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I) 일 텐데요 왕이 왕좌에 앉아있을 때 시종이 양산으로 받치고 있고 부조 아랫부분에서는 고대 페르시아의 하인이나 수행원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크세르크세스는 대군을 일으켜 그리스를 침공했던 왕으로도 유명한데요 스파르타 레오니다스 왕의 300명과의 전투로 알려진 테르모필레 전투와 그리스 함대와의 일전인 살라미스 해전을 치른 왕으로도 유명합니다. 이후에 다양한 건축활동도 벌였는데 수사과 페르세폴리스에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미완의 왕궁 공사들을 완성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왕은 성경에도 등장하는 왕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에스더기에 나오는 아하수에로(Ahasuerus)가 같은 인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사실 페르시아 비문에 나타난 페르시아 원어(Xsayarsa)의 방식으로 크세르크세스의 이름을 히브리어로 음역 하면, 에스더기에 나오는 아하수에로라는 이름과 거의 같은 데다가 다른 왕들의 통치 기간 및 정황으로 볼 때 역사학자들은 이 둘을 같은 왕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3층 계단 위로 올라가서 왼쪽에 52번 방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방에 들어가서 오른쪽 외벽을 따라 들어가면 지금 보이는 부조가 보입니다. 이 부조는 다리우스 1세의 궁전에 있던 궁전 계단 외벽의 부조인데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Artaxerxes III)의 페르세폴리스 궁전의 계단 건설을 묘사한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양 옆에는 맨 앞에 있는 조장이 다른 세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들어가는 모습인데요 왼쪽에 독특한 둥근 모자를 쓰고 있는 무릎까지 오는 긴 튜닉을 입고 있는 메디아(Media) 사람들과 오른쪽의 허리띠로 조이는 길고 헐렁한 가운을 입은 페르시아(Persian) 사람들이 각기 다른 옷을 입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하지만 이 두 나라가 입고 있는 옷은 다르지만 함께 일하는 모습이 하나의 뿌리를 가진 공동체 국가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부조인 것 같습니다. 이들은 외부에서도 메디아 사람과 페르시아 사람을 구분 없이 부르기도 한 점은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함께 일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제 몸을 오른쪽으로 180도 돌려서 벽장을 보시면 은 쟁반 아래쪽에 아람어 비문이 새겨진 도자기 파편이 보입니다. 아래 있는 것부터 보시면 아람어로 ‘여다냐의 미가야에게 안부를 전한다. 내가 어제 스가랴의 아들 호다비아의 이름으로 너에게 [말]을 보냈는데, 너는 오늘 오지 않았구나. 내 딸들이 [말]을 나에게 보냈다 [혹은 내가 너에게 다시 보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메시지는 기원전 475년경에 이집트의 오늘날의 아스완(Aswan) 지역에 해당하는 시네(Syene)와 엘레판티네(Elephantine) 지역 사이에서 오간 편지로 보이는데요 여기는 아람 사람과 유대인 정규 부대에 의해서 수비되는 지역이었습니다. 아람어는 한때 메소포타미아에서 국제어로 사용되던 언어였기에 다양한 지역에서 사용이 되었습니다. 여기 도자기 파편에 나오는 인물의 이름도 히브리인(유대인) 이름으로 추정됩니다. 아람어가 국제어로 사용되었기에 고대 기록물 가운데 아람어로 기록된 기록물도 상당수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제 벽장을 따라 왼쪽으로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가다 보면 다음과 같은 컵이 보입니다. 컵 모양은 페르시아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종교의식용 원뿔형 용기(Rhyton)하고 비슷하게 생겼지만 실제로는 음료수 컵의 기능을 했습니다. 큰 동물의 머리 컵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부터 인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은으로 된 부분이 뒤에 컵의 부분을 이루고 있는데 두꺼운 은판을 두드려 만들었지만 앞쪽에 있는 웅크리고 있는 황소 모양의 부분은 얇은 금판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황소의 양식인 이전에 아시리아에서 보았던 고대 양식과 비슷한 점이 있어 보입니다. 이 음료수 컵에는 와인 2병 이상이 들어가는 큰 용량으로 되어 있는데요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역사학자인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페르시아인들은 와인을 매우 좋아했다고 합니다. 시리아 알레포에서 발견되었지만 카흐람미얀마나스(터키)를 통해 전해진 유물입니다.

페르시아의 역사하면 그리스와의 전쟁을 빼놓을 수 없는데요 페르시아는 오랜 기간 그리스와 전쟁을 치르고 앙숙과도 같은 관계였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배경을 간단히 살펴보면 키루스 2세가 터키 서쪽 해안가에 자리 잡은 그리스인들의 도시들을 정복했을 때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의 통치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가 다리우스 1세가 통치를 시작하자 기회라 여기고 반란을 시작합니다. 이 반란을 진압하면서 아테네가 개입하고 다리우스는 그리스 본토를 정복하기로 결심하며 그리스 전역에 항복을 권유하는 물과 흙을 요구하는데 겁먹은 대부분의 그리스 도시들과는 다르게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페르시아 사절을 죽이게 됩니다. 이에 다리우스는 군사를 보냈지만 그리스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에 격파당하고 이후 다리우스가 죽은 후에는 왕위를 승계한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가 다시 군사 원정을 가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페르시아와 관련된 역사의 기록은 그리스의 역사 학자들이 많이 기록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리스 문자가 기록을 남기기에 더 유리한 면이 있었기에 그러했을 텐데요 반대로 어떤 부면은 그리스에 더 유리하게 기록된 부분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렇게 유물들을 함께 살펴보았는데요 페르시아 유물들도 3부작으로 진행하려 합니다. 2부에서도 다양한 유물들을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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