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정보/- 장소

방구석 투어 / 영국 박물관(대영 박물관) - 로마편 2부

by 톡톡오늘 2022. 1. 9.

사람에 대해 평가를 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인데요 지금 내가 누군가에 대한 평가를 한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바뀌기도 하고 과거에는 불편하게 만들었던 행동들이 미래에는 정말 필요한 습관이기도 하고 혹은 그 반대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모든 사람의 행동에 대해 판단을 내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잘못된 행동이나 빗나간 행동에 대해서는 조언하고 고쳐주려는 태도는 맞는 태도이겠지만 개인적인 기호나 생각과 맞지 않는 것과 관련해서는 항상 자신의 결정을 유보하고 그 사람의 필요가 사회의 흐름에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고민해봐야 하는 것 같습니다. 고대에도 사람들이 후계자를 정하고 그 사람을 훈련시키는 일에 있어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유의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어떤 경우에는 당대에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던 사람이 황제가 된 이후에 일으킨 물의로 인해서 후대에는 폭군으로 불리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폭군이 될 것으로 염려했는데 반대의 상황인 경우도 분명히 존재하기도 하죠.

이번에 살펴볼 로마 편 2부에서는 1세기 전후의 당대 유명한 황제들의 흉상들을 하나씩 보면서 인물탐구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70번 로마 제국(Roman Empire)이라는 방에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왼쪽에 메로에(Meroe)의 머리라 불리는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의 두상을 보려 하는데 현재 자리에 없네요. 왜 없는지 구글 화면을 확대해서 보니 2014년 12월 11일부터 2015년 2월 15일까지 다른 장소에서 전시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날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해보니 1층 3번 방에서 아사히 신문 전시관의 흥미로운 발견 이야기와 함께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현재 3번 방에서는 이 전시물을 찾아볼 수가 없어서 현재 확인할 길이 없네요. 그래도 유명한 전시물이니 아쉬운 마음으로 소개를 해드리자면 이 청동상이 1910년 수단에서 발굴되었을 때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눈동자의 홍채는 녹안으로 검은색 유리와 함께 구성되어 있었고 작은 구리 링으로 둘러싸여서 고도로 광택이 나는 석회암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고대 장인 정신으로 만들어진 이 걸작은 이전의 어떤 청동이나 대리석 두상보다 예술적으로 묘사하였는데요 이 두상이 수단에 있게 된 주요 이론으로 기원전 24년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를 정복한 직후에 고대 아프리카의 쿠시 왕국의 군대가 다시 이집트를 습격해서 아우구스투스의 동상을 파괴하고 약탈하고 이 초상화 머리는 전리품으로 가져가서 쿠시의 수도 메로에(Meroe)에 있는 승리의 신전 계단 아래에 묻혔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1910년에 리버풀 대학의 존 가스탕(John Garstang) 박사에 의해 발굴되었고 수단 발굴 위원회의 기증으로 영국에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발굴 즉시 이 머리가 로마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것으로 추측하였는데요 처음에는 아우구스투스의 증조카인 게르마니쿠스로 착각하였습니다. 그러다 다른 초상화와 비교하면서 아우구스투스의 것으로 다시 재확인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아우구스투스의 얼굴은 다른 장소에서 다시 확인해보겠습니다.

아우구스투스의 뒤편에 있는 벽장 오른쪽 아래에는 또 다른 두상이 보입니다. 이 두상은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버지이자 로마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인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입니다. 역대 카이사르 가운데 최초의 인물로서 기원전 46년에 10년 임기의 독재관으로 임명되었지만 기원전 44년에 암살당했습니다. 카이사르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소개하기는 어렵지만 몇 가지 일화만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로마 제국 내에 사는 사람들의 자치권과 참전권을 확대하고 원로원과 세금징수원이 걷어들이는 부정부패를 척결하려 했기에 시민들의 인기도 많았습니다. 기원전 46년에 로마의 역법을 태음년에서 태양년으로 바꾸는 포고령으로 그리스 천문학자 소시게네스의 계산에 근거한 율리우스력으로 바꾸게 되는데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은 율리우스력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1년을 12개월로 하고 평년은 1월 1일로 시작하여 365일로 하였으며 4년에 하루씩 추가하는 윤년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58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약간의 수정을 가한 그레고리력으로 바뀌면서 지금까지 사용하게 되었는데요 그때까지 불과 만 10일의 오차밖에 없었습니다. 의외로 종교의 자유도 보장해서 유대인들의 신앙을 보장하기도 했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주화에서 태양신 숭배의 상징으로 십자가를 넣게 되었는데요 이때부터 콘스탄티누스가 십자가를 교회의 상징으로 사용하기까지 태양신 숭배를 위한 십자가 사용이 이어져 왔다는 것도 흥미롭네요.

이제 벽장 너머로 가면 대리석 두상들이 많이 나오는데요 오른쪽에 처음 나오는 이 두상은 조금 전에 보려다 못 본 아우구스투스의 두상이고 맞은편 두상 가운데 왼쪽은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였지만 33세의 어린 나이에 요절한 게르마니쿠스(Germanicus)이고 오른쪽은 아우구스투스의 또 다른 흉상입니다. 아우구스투스의 원래 이름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Gaius Octavius Thurinus)입니다. 이후에 카이사르의 양자가 된 후에 카이사르 암살, 2차 삼두정치, 악티움 해전 이후로 모든 정적을 물리친 그는 35세의 나이로 로마 원로원에 의해서 ‘존엄한 자’라는 의미인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룬 치적 역시 많았는데요 원로원을 재편했고 속주 통치를 개편, 군 감축, 근위대 창설, 영토 확장 등 여러 가지 정책을 폈습니다. 그밖에 아우구스투스는 화폐제도를 개혁해서 금화 아우레우스(Aureus:데나리우스의 25배), 은화 데나리우스(Denarius:세스테르티우스의 4배), 황동 세스테르티우스(Sestertius:아시스의 4배), 구리 아시스(Asis)로 체계를 만드는데요 이후 300년간 이 제도가 유지가 됩니다. 데나리우스가 하루 12시간 일하는 일당이었으니까 한국으로 치면 16만 7900원(2020년 기준) 정도 될 거 같습니다. 이 정도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될 듯싶습니다. 성서에 나온 인구조사와 관련된 비문도 세간에 알려져 있는데요 아우구스투스 업적비(Res Gestae of Augustus)에서는 여러 차례 실시한 인구 조사와 관련해서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는 기원 14년 8월 19일에 76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됩니다. 앞서 카이사르와 같이 아우구스투스의 은화(데나리우스:Denarius)에서도 태양신 숭배와 관련된 도안이 뒷면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태양신과 관련해서는 뒤에 관련된 유물을 보면서 더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아우구스투스 왼쪽에 있는 두상들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왼쪽에 있는 두상은 여성으로 보이는데요 아우구스투스의 아내인 리비아 드루실라(Livia Drusilla)입니다. 리비아 드루실라는 호민관이었던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에 입양된 인물로서 명문 귀족 가문이었으며 아우구스투스와 재혼한 후에는 로마의 초대 황후로서 아우구스타(Augusta)라는 칭호도 받게 되는데요 이때 전남편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 가운데 장남인 티베리우스는 훗날 2대 황제가 됩니다. 하지만 아들인 티베리우스와는 아들의 결혼생활에 많은 간섭이 있었고 극심한 대립으로 사이가 극도로 나빠지기도 했습니다. 아들인 2대 황제 티베리우스, 증손자이자 3대 황제인 칼리굴라, 손자인 4대 클라우디우스까지 아우구스투스와 함께 왕조를 열었는데요 오래 살았던 아우구스투스보다 더 장수해서 86세의 나이에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리비아 드루실라 오른쪽에는 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Tiberius)의 두상이 보입니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공동으로 황제에 즉위했는데요 폐쇄적인 성격과 은둔 정치로 인해서 당대에는 폭군이라는 많은 비난을 받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생애의 대부분을 정치적인 음모와 내정간섭 속에 살았는데요 세야누스라는 근위대장이 근위대를 이용해서 자신이 황제가 되려는 정치적인 야망을 품고 친족들과 후계자들을 많이 말살하다가 티베리우스에게 음모가 발각되어서 체포되어 사형당하고 기록 말살형까지 집행해서 세야누스의 동상과 흉상 및 동전에 있는 초상화까지 모두 제거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로 티베리우스 말년에는 더욱더 공포정치를 많이 펼쳤는데요 원로원 내에 자신을 반대했던 반대파를 가차 없이 제거했고 세야누스의 일족과 가문 전체를 멸족하게 됩니다. 이때는 세야누스와 관련된 이름만 나오면 모두 숙청했는데요(조선의 연산군을 떠올리게 하네요) 친동생 드루수스가 세야누스에게 암살당한 과정을 알게 되면서 더 심한 폭주를 하게 됩니다. 이후에는 세야누스파 인사들의 어머니나 누이까지 죄인이 죽었는데 슬퍼한다는 이유로 자살을 강요당해 죽였습니다. 매일매일 숙청 대상자 이름만 나와도 그들의 가족과 친족까지 처참하게 몰락시키고 죽였습니다. 살해된 사람 가운데는 이전에 친구였던 사람들도 많으며 점성술사들에게 여러 자문을 구했고 생애 마지막 10년은 카프리 섬의 별장에서 남자들과 동성애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죽은 뒤에도 원로원은 그를 신격화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가 후대의 평가를 받을 때는 양면적인 면이 있는데 공포 정치를 펼쳤다는 점은 있지만 유능한 행정가로서 평가받기도 했는데요 사치스러운 것에 돈을 낭비하지 못하게 했기에 국가 재정이 괜찮았고 자신을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 여겨 여러 가지 영예로운 칭호 역시 거절하였습니다. 황제 숭배 역시 자기 자신보다는 아우구스투스에게 하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저지른 악덕이 더 많았기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황제였습니다. 성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당시의 황제이기도 하며 그의 이름 역시 성서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누가복음 3:1-3)

이제 맞은편에 보이는 대리석 흉상이 보이는데요 왼쪽은 4대 황제인 클라우디우스 1세(Claudius)이고 오른편은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입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앞서 간단히 다루어 보았으니 클라우디우스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티베리우스의 동생인 드루수스의 아들이고 3대 황제였던 칼리굴라의 삼촌이었는데요 기원 41년에 칼리굴라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역사 저술이나 학문적 연구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강한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전임 황제들은 그를 후계자로 적합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칼리굴라의 암살 뒤에 근위대에 의해서 강제로 황제로 추대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를 정치적으로 지지한 인물로는 헤롯 아그리파 1세가 있었는데요 그에 대한 보답으로 유대와 사마리아를 영토로 주었습니다. 그는 그런대로 잘 지냈지만 일설에서는 기원 54년에 그의 네 번째 아내에 의해서 독버섯으로 독살당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온화한 성격으로 야심이 큰 편은 아니었고 실무 경험이 없었지만 행정가로서 원로원 개혁이나 내정개혁 오스티아 건설과 같은 일을 많이 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정치적으로 소외된 탓에 자신감이 많이 부족했고 우유부단하다는 평가도 많이 받았는데요 후계 구도도 정확히 하지 않았기에 그가 급사한 이후로는 미숙한 네로의 통치를 가져오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서에도 클라우디우스의 이름이 몇 차례 나오는데요 사도행전 11:27-30에서 팔레스타인에서 있었던 큰 기근과 관련해서 클라우디우스 재위에 발생한 것으로 알려주는데 기원 46년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후에 사도행전 18:1-3에서도 나오는데요 재위 초기에 유대인에게 호의적이었지만 이후 소요사태를 자주 일으키는 유대인들에 염증으로 로마에서 추방하게 되는데 클라우디우스가 추방령을 내렸다는 내용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두상 왼쪽으로는 화려하게 장식된 칼이 하나 보이는데요 이 칼은 마인츠 글라디우스(Mainz Gladius) 혹은 티베리우스의 검(The Sword of Tiberius)으로 불리는 칼입니다. 이 칼은 1848년 독일의 마인츠 외곽에 흐르고 있던 라인 강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요 이곳은 고대에 로마 국경의 광대한 군단 요새이자 군사 지휘 본부가 있었습니다. 칼집은 놀라울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고 복잡하게 묘사되어 있는데요 윗부분에는 황제 티베리우스가 그의 양자인 게르마니쿠스를 만나는 장면으로 뒤에는 승리의 여신과 다른 신(마르스)이 서 있어서 군사적으로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묘사는 정치적인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데요 아우구스투스 치하에서 게르만 지역에서만 3개 군단 전체가 전멸하기도 했는데요 이후에 티베리우스가 그 다음에는 게르마니쿠스가 원정을 떠나 많은 승리를 하였고 그 승리를 축하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금과 은으로 보이는 것은 대부분 주석에 도금된 황동이고 칼의 주인은 고위 장교의 것으로 보이는데요 주인이 누구인지는 확실치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벽장을 넘어가서 왼쪽을 보면 부자 지간인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와 티투스(Titus) 그리고 오른쪽에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트라야누스(Trajanus) 흉상이 순서대로 보입니다.

순서대로 베스파시아누스(기원 9-79년)에 대해 소개하자면 그는 9대 황제로 네로가 자살한 이후로 극도로 혼란한 로마의 내전을 종식하고 2세기의 팍스 로마나의 기반을 닦은 황제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군인 출신이었는데요 그의 가문인 플라비우스 가문은 금융과 관련된 일을 해왔는데 당대에는 그 계통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평판이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베스파시아누스는 오히려 재무와 관련된 이해도가 높았고 꼼꼼했기에 3대 황제였던 칼리굴라(가이우스:Gaius)의 지원을 받고 출세의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후 무수한 행정, 군사적 경험을 쌓기도 하고 네로에 의해 유배되었다가 재 등용되는 등 우열곡절을 겪은 뒤에 여러 지역으로 파견되어 공적을 쌓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유대 독립 전쟁에서 칼리굴라의 처남인 코르불로(Corbulo)의 휘하의 시리아 속주로 파견되는데요 여기서 유대 전쟁사를 기록하는 등 유명한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를 사로잡고 도움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이 반란을 진압 중에 네로가 자결하고 반란이 일어나자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 및 여러 지역 통치자들의 추대로 황제가 되어 로마에 입성하고 정식으로 황제에 즉위하게 됩니다. 이후 장남인 티투스를 통해서 유대 반란군을 진압하게 되는데요 기원 70년에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게 됩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는 베스파시아누스가 미래의 세계 통치자가 유대로부터 나올 것이라는 생각이 일대에 퍼져 있었기에 미신적인 성향이 강했던 그는 유대 지역의 전쟁을 통솔하던 자신이 그 예상을 적중시킬 인물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특히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아누스의 이런 성향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는지 포로가 된 상황에서 그가 훗날 로마 황제가 될 것이라는 말을 하고서 목숨을 건지게 되는데요 실제로 그가 황제가 된 후에 요세푸스는 유대-로마 전쟁에서 많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후 79년에 베스파시아누스는 사망하고 그의 아들 티투스가 황제로 즉위하게 됩니다.

이제 베스파시아누스 오른쪽에 있는 흉상의 인물인 유대 전쟁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10대 황제 티투스(기원 39-81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황제로서의 재위 기간은 그리 길지 않은데요 그의 재위 기간 동안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폼페이가 매몰되기도 했고 로마에서는 대화재가 일어나고 페스트가 퍼지는 등 재난 재해가 많았으며 선친 베스파시아누스 때부터 건축된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콜로세움)을 완공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불과 2년 뒤에 열병으로 사망하게 되는데요 그는 황제가 되기 전 유대 전쟁으로 더 유명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베스파시아누스와 유대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가 네로가 사망하고 아버지인 베스파시아누스는 혼란한 정국을 정리하러 로마로 향할 때 티투스가 총사령관으로 새로 취임하여 전쟁을 지휘하게 됩니다. 그는 열심당원들이 버티는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기 위해 6만의 병력을 이끌고 남하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원 70년 6월에 티투스는 군인들에게 유대 지역에서 나무들을 모두 베라는 명령을 내린 후에 예루살렘 둘레에 뾰족한 말뚝으로 7킬로미터에 달하는 벽을 세우고 도시를 포위 공격하게 되는데요 예루살렘에는 기근이 닥치고 서로 약탈하는 등 점점 최악의 상황에 치닫게 됩니다. 이후 5개월에 걸친 포위 공격 끝에 도시와 성전을 약탈하고 불을 질렀는데 현대의 추산에 따르면 25만 내지 50만 명의 유대인이 예루살렘과 다른 지역에서 목숨을 잃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71년 로마로 돌아오면서 예루살렘에서 약탈한 물건들을 가져와 축제를 즐겼는데요 그의 사후에 동생인 도미티아누스는 티투스에게 영예를 돌리는 티투스 개선문을 세우게 됩니다.

이제 티투스 오른편에 조금 멀찌감치 있는 흉상은 13대 황제인 트라야누스(기원 53-117년)입니다. 그는 로마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룩한 황제로서 팍스 로마나의 전성기를 이끈 오현제라 부르는 황제의 두 번째 황제였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는 않은데요 군 복무를 10년 이상 하면서 많은 경력을 쌓기도 하였습니다. 원로원과도 사이가 좋았으며 지금의 루마니아 지방에 해당하는 다키아 원정도 수행하였습니다. 트라야누스를 동시대의 사람들은 완벽한 황제라 여기기도 했는데요 아우구스투스와 함께 제국이 질서를 유지한 명군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트라야누스 시절 로마의 경제는 부흥하였고 군사적으로도 적대국들을 모두 격파한 데다가 성격도 원만하였고 사생활에서도 구설수에 오른 적이 없었기에 많은 찬사를 받은 황제였습니다. 하지만 파르티아 군사 원정에서 큰 소득 없이 전쟁이 끝나고 건강이 악화되면서 로마로 귀환하게 되는데 귀환 도중 64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됩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을 사회의 불안 요소로 보았기에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드러나면 처벌을 받았었는데요 기원 111년쯤에 비티니아(현재의 터키) 속주 총독인 소 플리니우스는 그리스도인 문제와 관련해서 강제로 타협시키고 처형한 건에 대한 편지를 보냈는데요 그 문제를 처리한 방법에 대해 칭찬하면서 로마의 신들을 숭배하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은 사형에 처하라고 지시하면서 타협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용서해주라는 답장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이어지는 3부에서도 다양한 인물들과 흥미로운 유물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