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리아 인들은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1940년대부터 1963년까지 성공한 사업가들도 많았고 정치, 군사, 예술, 체육 분야에서 두드러진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요 1963년에 이라크에서 아랍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바트당이 집권한 후로 박해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몇 년간은 이라크 북부와 시리아 북동부의 아시리아인들은 IS나 알카에다 같은 이슬람 무장단체에 의해서 대학살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IS는 2014년 이라크 북부와 시리아 북부의 아시리아 집성촌을 공격했습니다. 특히 고대 니네베가 있었던 모술과 같은 도시에서는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로부터 집이나 재산을 빼앗기고 다른 지역으로 쫓겨났습니다. 그런 데다가 아시리아 사람들의 문화유산들이 IS로부터 파괴되고부터는 아시리아인 스스로가 자신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서 민병대를 조직해서 대응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자신의 민족과 종교가 중동에서 살아가는데 어려움을 겪게 하는 요인이 되었네요. 이제 아시리아와 관련된 마지막 4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계속해서 8번 방에 있는 유물들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번 마지막 유물이 세 번째 기둥에 있는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Tiglath-pileser III)의 부조를 봤는데요 이제 첫 번째 기둥 옆 벽에 있는 부조를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부조는 티글라트 필레셀르 3세(Tiglath-pileser III)의 정복 전쟁에서 그가 포로로 삼은 사람들을 유배시킨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집단 유배 통해서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막은 최초의 아시리아 왕이었습니다. 1년 동안 최대 15만 4,000명이 강제 유배되었던 것으로 집계되는데요 아래 부조의 위쪽에는 서기가 유배와 관련된 내용을 점토판에 기록하는 모습까지 새겨놓았습니다.
이제 방금전 보았던 부조옆에 라마수 석상 사이에 있는 9번 방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이 방 안의 부조는 센나케리브(산헤립) 왕궁 뜰의 양면을 장식했던 것인데요 보통 전쟁 장면을 부조로 장식하기도 하지만 안으로 쭉 들어가서 중간 오른쪽에 보이는 부조에서는 센나케리브(산헤립)의 건설 공사의 일부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라마수(날개 달린 인면 황소)석상을 옆으로 눕혀서 니네베로 수송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센나케리브(산헤립)가 건축과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조인 것 같습니다. 센나케리브(산헤립)는 자신의 궁전을 ‘비할 데 없는’ 궁전이라고 자랑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궁전을 관리하기 위해 수많은 전문가와 예술가들을 고용했고 고위 관리들까지 두었습니다. 그는 고대 도시 니네베를 놀라운 모습으로 변화시킬 계획을 세우는데 65km~80km의 운하와 석조 수로를 만들어서 도시의 공원과 과수원, 정원을 조성하였습니다. 이 구조물은 고대의 채석 기술과 건축 기술을 재연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큰 돌은 거대한 쇠톱으로 잘려 있었고 인부들 혹은 전쟁에서 끌려온 노예들이 끌고 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들은 거대한 형체(최대 16톤의 크기)의 무게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거칠게 조각낸 다듬은 돌을 가져와서 니네베에서 최종 조각을 했습니다.
오늘날 세계가 국가의 구분을 위해서 국기를 사용하는 것과 같이 고대 조각에서는 헤어스타일을 통해서 다른 나라 사람들을 표현하였습니다. 여러 부조를 보면 아시리아인들이 정복하고 노예로 삼았던 다른 지역 사람들을 다양하게 표현하는데요 여기 부조의 노예들은 다른 나라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의 모습은 라기스 전투에서 표현된 유대인들과 같은 독특한 헤어스타일과 머리 장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센나케리브(산헤립)의 유대 지역 출정에서 라기스 지역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일대의 수많은 유대인들을 포로로 끌려 갔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살해되지는 않았지만 석재 채석장에서 일하면서 또 다른 고난이 있었을 것임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이번 부조는 9번 방에서 가장 가장자리쪽에 있는데요 이방 어디에 있든지 까맣게 그을린 자국이 있어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부조입니다. 아시리아 궁수들이 알라무(Alammu)라는 지금의 터키나 이란에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지역의 성읍 마지막 마을을 향해서 공격을 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부조는 검게 그을린 모습으로 더 유명한데요 니네베의 최후가 어땠을지를 보여주는 부조이기 때문입니다. 니네베는 메디아와 바빌로니아 연합군에 의해서 멸망되었는데요 그 당시는 그들의 잔혹한 통치 행위로 인해 이미 수많은 반란과 내전으로 제국의 힘이 약해진 상황이었습니다. 니네베 도서관에서는 아시리아의 연대기를 찾아볼 수 있는데 아슈르바니팔의 친형인 샤마쉬숨우킨이 반란이 일어난 바빌론을 정복하면서 갑자기 끝나게 됩니다. 이후 신샤리쉬쿤의 통치 기간에 바빌로니아을 주축으로 여러 지역의(바빌로니아, 메디아, 페르시아, 키메르, 스키타이) 연합군이 니네베를 석 달간 포위 공격한 끝에 8월 여름에 메디아 군이 방어선을 뚫고 도시와 사원 약탈하고 궁궐을 불태우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의 검게 그을린 자국은 그 당시의 긴박했던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이 전투로 아시리아 제국이 몰락하고 새로운 제국이 부상하게 되는데 그 국가는 다음 편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9번 방에서 다시 8번 방으로 나가는 방향으로 출구쪽에 보면 아래에 다음과 같은 부조가 보입니다. 이 부조에서는 아시리아 군이 포로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아시리아 군은 포로들의 목을 베고 그들의 머리로 피라미드를 만들었습니다. 때로는 포로들의 머리로 나무를 장식하기도 하고 어떤 기록에서는 잘린 머리로 만든 목걸이를 자랑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의 잔인함은 매우 창의적이기도 했는데 다리, 팔, 코, 혀, 귀, 고환 등을 잘라내고 눈을 도려내기도 했고 어린아이들을 산 채로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잔인함은 심리적으로 효과가 있어서 아시리아 군대가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도시 전체가 항복하기도 했으며 아시리아 왕은 이러한 잔인함을 신성한 권리로 여기고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잔인함은 끊임없는 반란과 전쟁으로 많은 적들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제 다른 장소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중앙에 Great Court로 나와서 이집트편에서처럼 뒷문 쪽으로 갈 텐데요 오른쪽 계단을 통해서 3층으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55번 방은 고대 메소포타미아라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53번, 54번 방을 거쳐서 55번 방까지 가보시죠. 왼쪽 벽장에 여러 쐐기 문자들의 도자기들이 보이실 텐데요 이 도자기는 아시리아의 아슈르바니팔 도서관에 있던 책의 일부분입니다. 여기에서는 광범위한 주제를 다룬 최소 30,000개의 점토판이 발견되었는데요 쐐기 모양의 설형문자로 작성되었습니다. 이 설형문자를 해독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요 1835년에 영국의 장교 헨리 롤린슨은 이란의 베히스툰 산에 위치한 다리우스 1세의 다국어 비문이 발견하였고 다른 쐐기문자들도 해독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로제타석과 같이 같은 글을 페르시아어, 엘람어, 바빌로니아어 이 세 가지 설형 문자로 기록된 버전을 통해서 고대 언어들을 번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도서관에서는 종교, 의학, 천문학, 수학, 역사, 문학 등 다양한 형태의 책들이 있는데요 놀랍게도 니네베가 연합군에 의해 파괴되고 불타면서 이 점토판은 더 단단하게 구워져서 지금까지 잘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계속 해독 중인데요 지금까지 발견된 흥미로운 내용들 가운데는 성서와 관련된 내용도 다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노아의 홍수와 같은 홍수 이야기의 전설을 적어놓은 서판도 있습니다.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은 성서에도 나오는데요 에스라 4:10의 아스납발이 아슈르바니팔 이름의 단축형인 것 같은데 L에 해당하는 문자가 없는 페르시아어의 특성으로 마지막 L에 해당하는 문자가 R에 해당하는 문자로 대치되면서 아스납발로 불린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보시는 유물은 영국 박물관의 대표 유물 가운데 하나인데요 센나케리브(산헤립)의 정복에 대한 세 가지 기록이 담겨 있는 센나케리브(산헤립) 연대기라는 유물입니다. 이 연대기는 테일러 프리즘이라고도 불리는 것인데요 1830년에 로버트 테일러라는 영국 장교에 의해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일한 내용으로 새겨진 이 연대기가 3개가 발견되는데요 하나는 시카고의 동양 연구소에 있고 나머지 하나는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박물관에 있습니다. 이 육각형 점토 비문에는 성서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서 발견된 당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요 센나케리브(산헤립)의 이러한 자랑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 히스기야는 나의 멍에에 굴복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의 견고한 도시 46개와 성벽이 있는 요새들과 그 인근의 무수한 작은 마을들을 포위 공격하였으며 정복하였다. 나는 그 자신을 새장에 갇힌 새처럼 그의 왕도인 예루살렘에 갇히게 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기록에서는 센나케리브(산헤립)가 예루살렘을 정복했다는 언급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다루었던 것처럼 금 30 달란트와 은 800 달란트 등 다양한 공물을 받았다고 주장하는데 고대 왕들처럼 과시하는 투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시리아의 다양한 유물들을 살펴보았는데요 모든 유물을 살펴본다기보다는 우리가 좀더 익숙하게 다가가고 이해할 수 있는 유물들을 위주로 살펴보았습니다. 지난번에도 이야기했듯이 아시아 유물들이 대부분 불교문화와 접해 있듯이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유럽의 유물은 기독교 문화를 기반으로 성서의 내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특히 실제로 있었던 사건들과 관련해서 볼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 이제 며칠 뒤에는 아시리아의 뒤에 이어서 제국을 이룬 나라를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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