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하면 온몸을 철로 두른 중무장한 철갑기병이 먼저 떠오를지 모릅니다. 이러한 중장기병은 개마무사라고도 불렸는데요 사실 신라나 가야 심지어 중국이나 유럽에서도 이러한 중장기병은 널리 운영된 병과였습니다. 이러한 중장기병을 개마무사(개마고원과는 다른 의미입니다.)라고도 불리는데요 고구려 벽화에 이 기병을 그려 넣었을 만큼 동아시아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중국의 여러 나라와 국운을 건 전쟁을 대등하게 펼칠 정도로 강한 국력을 가졌지만 넓은 국경선 대비 적은 인구(멸망 시 130만 추정)와 잦은 전쟁으로 국력이 약해져 기원 668년에 결국 멸망하게 됩니다. 고구려관에서 관련 유적을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때부터 국력이 회복되면서 기원 396년에는 광개토대왕 시절에는 남쪽에서 잦은 침공을 감행하던 백제를 공격해서 한성 위례성을 점령하여 항복을 받아냈고 이후 399년, 404년 두 차례에 걸쳐 백제, 왜, 가야 연합군을 격파한 뒤에 결국에는 기원 475년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략해서 한강 유역을 차지하게 됩니다. 임진강 유역과 양주 분지 일원, 한강 하류 역, 금강 유역에서 고구려의 남진과 관련된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교통로를 장악하기 위해 고구려 군이 축조한 군사적 목적의 소규모 성곽에서 발견되었는데요 아차산과 용마산 일대 보루들에서 온돌 시설이 있는 건물 지역과 저주 시설, 간이 대장간, 방앗간 시설 등 다양한 유물이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1979년에 발견된 중원 고구려비를 통해 기원 5세기경 고구려의 남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른쪽 아래에는 ‘호우’ 글자가 있는 고구려 청동 그릇인데요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이 그릇에는 광개토대왕릉비와 같은 글자체의 돋을새김이 있습니다. 을묘년(415년)은 광개토대왕의 장례를 치른 다음 해인데요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이 그릇을 신라 사신이 가져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왼쪽에 도끼날과 삽날, 호미, 보습, 접시, 수막새 등은 고구려의 전통 양식을 보여주는 도구들이고 아차산 혹은 서울 구의동, 충북 청원 남성골 등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초기 고구려는 국교가 따로 없이 다신교적인 색채를 띄었는데요 소수림왕때부터는 불교가 들어오고 이후 도교도 함께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불교는 왕이 곧 부처를 표방하는 왕실 불교가 되었는데요 승려들은 왕권의 존엄과 충성에 함양되어서 적극적으로 복무하였고 이러한 국가 정책은 백제나 신라에도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고구려 말기에는 일체중생이라 해서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을 지녔다고 주장하는 열반경이 전해지게 되는데요 결국 7세기 중반에는 연개소문이 도교를 장려하게 되면서 이에 반발해서 백제로 대거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불교가 확산되면서 현세에서의 행위에 따라 불교적 윤리관에 의해서 내세의 삶이 주어진다고 하는 전생적 내세관이 퍼지게 되는데요 이러한 의식이 일반인들의 생활 속에 널리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고구려의 성 내부에는 여러 건물로 정비된 도로 등 다양한 시설이 있었고 귀족의 집은 사랑채와 안채로 이루어졌으며 마구간, 차고, 부엌, 다락창고, 방앗간, 고깃간 등의 부속 시설과 잘 꾸며진 정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요 건물은 기와로 지붕을 덮었고 난방 시설로 부분 온돌을 설치했으며 일상생활에서 평상이나 좌성을 사용하였는데 방 안에서 신발을 벗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디딜방아로 곡식을 찧었고, 가루를 내어서 시루에 쪄먹거나 아래층에 기둥만 잇고 본체 위에 고상식 구조의 다락 창고에 곡식을 보관하였습니다. 부엌에서 조리한 음식을 소반에 받쳐 들고 안채나 사랑채로 가서 상차림 하였으며 주인과 손님의 상을 따로 차렸습니다. 말이나 소가 끄는 수레를 탔는데 일반적으로 마차는 남자용이었고 우차는 부인용이었지만 귀족 남자들도 외출할 때는 우차를 많이 이용하였습니다. 또한 이들은 바큇살이 있는 개량된 수레바퀴를 만들어 사용하였습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물에는 집 모양 토기와 부뚜막, 시루와 솥, 불에 탄 곡물 등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물은 네 귀 달린 항아리인데요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유물입니다. 금관총은 신라 마립간기를 대표하는 부장품인 금관이 처음 출토된 무덤인데요 ‘이사지왕’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고리자루 큰 칼도 출토된 무덤입니다. 여기에서는 풍만하고 긴 몸체와 어깨에 띠모양 손잡이 4개를 붙인 형태의 고구려 형태의 토기가 출토되었는데요 금관총의 주인이 사망한 시점(기원 5세기경)에 고구려에서 신라로 보낸 물품으로 보입니다.
지금 보이는 못신은 고구려의 금동 신발로서 바닥판만 금속으로 만든 특징을 가지고 있고 못의 개수가 많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지안 삼실총과 통구 12호분 벽화에 이러한 신발을 신고 있는 고구려 무사가 묘사되어 있는데요 이 신발은 바닥판만 남아 있습니다. 이 바닥판에는 금동못 40여 개가 촘촘히 박혀 있고 가장자리에 작은 구멍이 작을 이루어 뚫려 있는 것으로 보아 위쪽으로 가죽이나 천으로 연결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니다. 실제로 사용한 제품이라기보다는 의례용 물건으로 보이는데요 실제로 사용했을 신발은 자신을 공격하는 적을 말 위에서 내리찍는 스파이크 용도로 짐작하기도 합니다.
이 고구려실 옆에는 강서대묘 무덤 벽화를 볼 수 있는 전시실이 별관으로 있는데요 관심있는 분들은 이 장소를 개인적으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고구려편을 마쳤는데요 며칠뒤에 소개하는 백제편에서도 국립중앙박물관의 다채로운 유물들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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