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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보/- 장소

박물관 투어 / 국립중앙박물관 - 고구려 1부

by 톡톡오늘 2022. 8. 4.

국사 시간에 항상 ‘만약’이라는 단서를 붙게 하는 고대 국가가 고구려인데요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지금 한반도 지역 국경선이 어떻게 되었을지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것은 없지만 재밌는 상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국경선보다 삶의 질이 어떠한지가 더 중요할지 모르는데요 고구려와 같이 넓은 국경선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전쟁과 국민들의 희생이 필요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그 반대로 고구려가 위치한 지형이 평지에서 올라가는 산악지형에 있었기에 오히려 외부의 침입이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고구려 안에는 다양한 소수민족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었기에 만약에 고구려라는 국가 체제가 계속 유지되었다면 내부적으로는 민족 갈등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고구려 유물이 다양하지는 않지만 일제강점기부터 발굴하고 보관된 몇몇 주요 유물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요 함께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물은 고구려의 금동관인데요 신분에 따라 다른 모양의 관을 착용했습니다. 오른쪽에 보이는 관은 중앙과 하부는 떨어져 나갔는데요 이 금동관을 산자 모양으로 오린 뒤에 구멍을 내어 장식하였고 내부는 역 하트 모양과 삼엽 무늬를 표현하였습니다 이 금동관은 고구려 깃털 모양의 금동관 장식과 유사한 모양인데요 중국 북연의 풍소불묘에서도 발굴되어서 고구려와 많은 교류가 있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왼쪽 위에는 평양 청암리에서 출토되었는데요 8개의 솟은 장식이 있고 불꽃무늬와 인동무늬가 좌우대칭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그 아래에는 어디에서 출토된 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고구려 절풍 모자와 같은 장식으로 만들어져 고구려 금동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왼쪽 아래에는 고리 귀고리가 보이는데요 성별과 신분의 차이와는 상관없이 누구나 귀고리를 착용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지금 보이는 기와 왼쪽은 짐승 얼굴무늬 수막새라 불리는 기와인데요 귀신의 얼굴 형상으로 표현되어서 악귀를 쫒는다는 의미로 주술적인 의미에서 만들어진 문양입니다. 이러한 무늬는 고대 중국 은나라 이후의 청동기 시대의 무늬와 유사한 점이 있기에 중국의 영향을 받은 기와라 볼 수 있습니다. 그 오른쪽은 연꽃무늬 수막새라 불리는 기와인데요 중국 길림의 태왕릉 부근에서 출토되었고 전형적인 고구려 전기의 기와 형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운데는 둥글고 볼록한 꽃술이 있고 연꽃 사이와 둘레에는 2줄의 돋을 선으로 구획이 지어져 있습니다. 그 아래에는 글자가 새겨진 벽돌인데요 태왕릉 천주총의 무너진 돌무지 속에서 발견된 벽돌입니다. 새겨진 글자는 ‘원하옵건대 태왕릉이 산처럼 안전하고 뫼처럼 튼튼하소서’ 등과 같은 글이 적혀 있습니다.

지금 보이는 벽화는 북한 평안남도 용강군 용강읍에 있던 고구려 고분인 쌍영총 널길 서쪽 회벽 위에 그려진 벽화의 일부분인데요 수레와 말 탄 사람과 악대 등 다양한 벽화가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없어진 상태입니다. 1913년 일본인에 의해서 조사될 때 조선총독부박물관에 보관된 이래 지금까지 보관되어 있는데요 고대 고구려인의 복식과 말갖춤 등을 볼 수 있는 자료입니다. 이 무덤 벽화는 무려 160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생생한 모습을 전해주는데요 절풍이라 불리는 고구려 특유의 모자에 새 깃 두 개를 꽂아 장식한 조우관을 쓰고 있고 안장과 발걸이를 사용하면서 재갈과 고삐를 이용해 달리는 말을 부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위에 보이는 전시물은 진파리 7호분 금동판인데요 평양시 역포 구내 소재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중앙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세발 까마귀(삼족오)를 표현했고 그 위에는 봉황이 있으며 양 옆에는 용이 각각 표현되어 있습니다. 금동판 뒷면에 나무판을 댔는데 그 사이에는 비단벌레(옥충)라는 곤충 날개를 깔아서 바탕이 금녹색이 되어 금색이 더욱 선명하게 하는 효과를 내었습니다. 이러한 비단벌레 날개로 장식된 제품은 신라 황남대총에서도 출토되어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매장된 사람의 머리 부분에서 1쌍이 출토되어서 금동관을 구성하는 것으로 생각했었지만 최근에는 베개 마구리 장식으로 더 강하게 추정하고 있습니다. 아래 보이는 금동 봉황 모양 꾸미개는 평안북도 운산군 동신면 용호동 1호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1918년 세키노 타다시에 의해 출토되었습니다. 봉황 모양 꾸미개는 얇은 금동판을 오려서 봉황의 옆모습을 만들었는데요 역 S자로 휘어 있는 몸에 커다란 꼬리깃이 뻗어 있고 날개는 별도로 제작해서 결합했지만 현재 온전하게 남아있지는 않습니다. 표면에는 별다른 장식이나 무늬가 없이 단순하게 제작되었고 일직선으로 뻗은 두 다리에 각각 하나의 못 구멍이 있어서 어딘가 부착되었던 장식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대 가장 선진화된 무기 기술을 가지고 있던 중국과 비교했을 때 고구려의 무기들은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을 유지했습니다. 철갑기병을 생각해봐도 사람과 말을 감싸는 찰갑을 생산하기 위한 철 생산량과 가공기술을 생각해보면 병기 생산 능력이 뛰어났음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또한 활쏘기와 말타기를 어릴 때부터 배우게 한 점을 보면 궁병과 기병의 운영 능력과 수준이 상당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요 중국 왕조들의 병장기에 대등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해외 기술자들을 들여와 발전시키기도 했습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물은 왼쪽은 말의 말갖춤, 중간은 도끼날 혹은 창날이며 오른쪽은 찰갑의 일부분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제 2부를 통해 계속해서 고구려의 전시물들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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