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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투어 / 국립중앙박물관 - 백제 1부

by 톡톡오늘 2022. 8. 8.

백제와 관련된 역사 가운데 가장 미스터리 한 부분 가운데 하나는 요서경락설입니다. 삼국시대 당시 백제가 중국의 요서 지방(랴오닝 성)을 지배했다는 학설인데요 직접 지배했다는 설부터 군사적, 상업적 거점이었다는 설까지 다양한 설이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설은 남북조 시대의 ‘송서’와 ‘양서’에 기술되었기에 주장할 수 있는 설인데요 당대 한반도 안에 기록은 모두 소실되고 없기에 중국의 기록에 의지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특히 조선 후기의 실학자에 의해서 주장되기 시작하면서 여러 긍정론과 부정론이 존재하는데요 전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설은 백제가 요서 지방을 북연의 허용 아래 일부 군사적 활동이 포함된 무역기지 즉 활동의 거점으로 삼았다는 설입니다. 하지만 역시나 안타깝게도 기록이 부실해서 정확한 건 알 수 없습니다. 이제 국립중앙박물관의 백제 유물들을 하나씩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백제는 고구려의 초대 군주인 동명성왕(주몽)의 아내인 소서노의 아들인 온조가 건국한 나라입니다.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에서 비류와 온조 형제가 남쪽에서 각각 미추홀과 위례를 도읍으로 나라를 세웠다고 하는데요 결국 동생 온조에 의해 병합된 것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고구려 지배 계층이 세운 나라로 소개 되어 있는데요 백제라는 국호 대신 남부여로 나라 이름을 바꾸기도 하였습니다. 초기에는 북쪽의 낙랑군과 남쪽의 마한 연맹의 목지국에 압력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냈지만 짧은 시기 나라를 성장시켜 불과 50년도 안되어서 주변 강국들을 병합시키고 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물은 서울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철기 집기들인데요 망치와 집게가 왼쪽에 보이며 충남 천안에서 발견된 백제의 말갖춤입니다.

백제는 한강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한나라의 낙랑군과 같은 군현을 막아내고 마한의 영역으로 확장하면서 크게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백제는 행정 구역이 바로 군사 행정 제도 체제와 편제가 같이 되어 있었는데요 근초고왕 시절의 백제 전성기 시절에는 최대 30,000명까지 원정에 군대가 동원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물은 고리자루칼이라 불리는데요 둥근 손잡이 고리 안에 용이나 봉황 등을 조각하거나 고리에 직접 문양을 새겨서 화려하게 장식된 칼이며 높은 사회적 신분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백제는 기존 전통적 기반 위에 우수한 기술을 도입해서 토기와 철기등 다양한 생산 활동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토기는 세발 접시, 굽다리접시, 검은간토기 등이 제작되어서 이전까지는 다른 모양과 기술을 선보이게 되고 기와는 당대의 토기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제작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동전무늬 수막새 등과 막새기와는 주로 한성 도읍 시기에 출토되었고 철 생산은 백제의 지방에서 주로 이루어졌으며 중앙에서 장악하고 통제하였습니다. 철기 제작에 있어서 상감기법이 발전하였고 칠지도나 은상감 고리자루칼 등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철제 농기구의 발전으로 농업 생산력의 증대와 인구 증가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물은 백제의 금동관모입니다. 대체로 한성 후기인 4세기 말에서 5세기부터 이러한 반원형 고깔 모양의 상투를 덮는 관모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요 대체로 지배계층의 고분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백제의 도읍이었던 한성 근처보다는 충남 일대부터 남쪽 지방에서 주로 출토되었는데요 주로 지방 출신의 유력자로 중앙 조정으로부터 왕, 후, 장군 등의 작호를 수여받은 지방 귀족들이 주인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금동관모는 흥미롭게도 일본 규슈의 에다후나야마 고분에서도 출토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관모 착용을 통해서 군신의 서열이 확고했고 중국 문화의 영향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보이는 가운데 전시물은 백제 문화의 정수로 꼽히는 백제금동대향로이며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물은 모조품이고 진품은 국립 부여박물관에 있습니다.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주차장 공사를 하던 중에 발견되었는데요 이 장소는 백제 시대 왕실의 사찰이 있던 곳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사찰은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이라 새겨진 명문으로 봐서 아들 위덕왕이 성왕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원찰로 추정합니다. 정확한 제작 연대는 대략 6세기 말-7세기 초로 추정됩니다. 이 향로는 향을 피우기 위한 물건이었기에 뚜껑을 열고 안에 향을 넣은 뒤 불을 붙이면 12개의 구멍에서 향이 피어 나오게 만든 물건이었습니다. 향로에는 봉황, 용, 코끼리, 원숭이, 악어 등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 여러 동물들도 묘사되어 있는데요 42마리의 동물과 17명의 인물이 부조되어 있습니다. 대향로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위덕왕은 왕자 시절 신라에 무리한 공격을 감행했는데요 아버지 성왕은 아들인 위덕왕을 격려하고자 현장을 방문하다 신라군의 매복에 전사하고 위덕왕은 죄책감에 시달려 크게 방황했는데 자신 때문에 전사한 아버지 성왕을 기리기 위한 향로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백제는 총 3부로 진행하려 하는데요 이어지는 2부에서 계속해서 내용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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