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세계의 도시들은 대부분 중요한 강을 끼고 있는데요 아라비아 사막의 북서쪽 경계의 페트라는 물 부족 때문에 발전한 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대륙을 가로지르는 무역로의 휴게소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요 이 지역을 지나는 상인들은 이 지역을 경유해야 물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이 지역은 홍해와 다마스쿠스를 연결하는 길목과 페르시아 만과 지중해 연안의 가자를 연결하는 길의 중심지에 있었기에 많은 발전을 할 수 있었고 경유한 뒤에는 가축의 먹이와 숙박을 위한 비용 지불에 더해서 경비병들과 문지기 혹은 사제와 왕의 종들에게까지 선물을 주어야 했습니다. 이들은 물을 구하기 위해 단단한 바위를 깎아서 수로와 저수조, 그리고 급수조를 만들었으며 페트라 근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거의 모두 모아서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낙타를 기르면서 상업 중심지를 건설할 수 있었는데요 지금까지 남아있는 페트라의 알 카즈네는 유명한 관광지로 남아 있습니다. 이제 4부를 통해 남은 유물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시대 여성들의 헤어스타일을 볼 수 있는 조각상입니다. 이 여자들의 머리 모양을 보면 신경을 많이 쓴 것으로 보이는데요 땋아서 올린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유행하는 머리 모양에 따라 시대를 알아볼 수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머리 모양은 개인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중요한 표현 방법이었는데요 나이와 사회적 지위, 재산 및 직업 등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서 결정되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신분의 차이를 떠나 당대 여성들은 머리 모양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요 이런 머리 양식을 위해 전문 미용사들은 머리에 층을 올려서 풍부하게 만드어야 했고 시간과 비용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당대 많은 여성들이 가발을 쓰고 염색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이 전시물은 로마 시대 사용했을 청동 거울입니다. 고대에는 돌을 연마해서 만드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청동이나 구리 그리고 후대에는 주석과 은, 금과 같은 금속으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아마도 유리 거울은 기원 1세기에 비로서 사용이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 당시에도 대부분은 주조된 금속으로 된 거울을 사용하였습니다. 현대의 거울은 유리판 뒤에 얇은 코팅이 있기에 반사율이 높은데요 고대 거울은 반사면이 선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속돌 가루를 발라서 정기적으로 닦아주어야 윤곽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오른쪽에 지금 보이는 전시물을 다이아뎀(Diadem)이라 불리는 왕관 형식의 여러 장식이 달린 머리띠입니다. 그리스어 디어데마(διάδημα)에서 왔는데요 ‘둘러메다’는 의미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얇은 금판과 인상적인 장식으로 만들어진 다이아뎀은 기원전 5세기부터 로마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무덤에서 발견되었으며 안티오코스 3세의 동전에도 이러한 다이아뎀을 쓰고 있는 모습이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초기에는 리본 형태로 종종 왕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 머리에 감싸기도 했고 고대 스포츠 경기에서 승리한 선수에게 왕관으로 씌울 때 머리띠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금과 같은 금속 형태로 바뀌게 되었는데요 왕권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왕이나 왕족들이 많이 썼습니다.
지금 보이는 유물은 요르단 일대에 존재했던 나바테아인(Nabateans)들의 유물인데요 현재 요르단인들의 직계 조상입니다. 에돔이 멸망한 이후에 베두인들이 이 지역에서 정착을 하게 된 것이 나바테아인의 시작이었는데요 이들은 셀레우코스 왕조가 쇠퇴한 이후에 나바테아 왕국을 건설하고 현재 여러 영화에서도 나오고 관광지로도 유명한 알 카즈네가 있는 페트라를 수도로 하고 문화를 꽃피우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후 하스몬 왕조를 계승하고 헤로데 대왕과 주요 라이벌로서 지역 패권을 다투기도 했는데요 기원 106년에 결국 로마에 병합되었습니다. 하지만 로마에 동화되지는 않았으며 이후 이 나바테아인들은 가산 왕국을 다시 건국하게 됩니다. 이들은 성서에도 한번 등장하는데요 고린도 후서 11:32에서 바울은 아레다 왕의 총독이 자신을 붙잡으려 했다고 나오는데 이 아레다(아레타스) 4세가 당시 나바테아인의 왕이었습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물은 벳 쉐아림(Beit She'arim)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입니다. 이 지역은 갈릴리 서쪽의 갈릴리 산맥 남쪽 끝에 있는 장소로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 3세기까지 로마 시대의 유대인 마을이었으며 2세기 중반부터는 이 마을 인근 묘지에 묻힌 랍비 유다 하나시가 이끄는 산헤드린의 소재지가 되었습니다. 이 마을의 중앙에는 묘지가 있었는데요 해외에서 죽은 저명한 유대인들도 이 장소에 매장되었습니다. 기원 4세기에 이 마을은 파괴되어 잊혔지만 1875년에 재발견되어 1936년 유대인 팔레스타인 탐사 협회의 후원으로 발굴되면서 많은 부분이 발견되었으며 지하 묘지의 석관에는 히브리어와 아람어 그리스어로 새겨진 다양한 장례 비문이 있었습니다. 또한 석관에는 다양한 헬레니즘 양식의 문양이 있었는데요 고대 그리스 문화를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박물관의 마지막 주제인 무슬림과 십자군의 성지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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