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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투어 / 이스라엘 박물관 - 로마의 통치편 2부

by 톡톡오늘 2022. 4. 26.

고대로부터 많은 국가들이 깃발을 사용했지만 로마처럼 두드러지게 사용한 경우도 드물었습니다. 사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국기도 로마시대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요 로마군의 선두에는 모든 군단이 똑같이 독수리 모양의 깃발이 위치합니다. 그다음 부대기라고 할 수 있는 군단기가 둥근 원반 모양을 한 깃발과 함께 뒤따랐습니다. 지금도 각 국가마다 혹은 부대마다 같은 성격의 깃발이 있는데요 그 가운데서도 로마의 깃발은 외형만 보면 현대의 부대 깃발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이들은 창 끝에 직사각형의 붉은 천을 매달고 그 위에 군단을 표현하는 각종 상징을 새겼으며 이들은 창끝에 세로로 길게 늘어뜨린 깃발로 가로로 긴 지금의 깃발과 조금 다르지만 굳이 차이를 좀 더 들자면 깃봉이 조금 다르게 생겼다는 점이 있습니다. 이제 로마 군단에서 사용되었던 각종 유물들을 계속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벽장 안에 보이는 칼은 로마 보병이 쓰던 글라디우스(Gladius)인데요 모든 검을 의미하는 라틴어 명사입니다. 이 검의 정식 명칭은 스페인 검이라는 의미인 글라디우스 히스파니엔시스(Gladius Hispaniensis)이며 주로 적과 직접 맞붙어 싸울 때 찌르는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칼의 길이는 약 50센티미터 정도 되는 크기인데요 길이가 짧았던 이유로는 당시 사람들의 신체적 기술적 한계와 군사적 문제도 있었지만 당시 기술로는 튼튼하고 긴 칼을 만들기 어렵기도 했고 체구도 작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로마 군대가 막강했던 한 가지 이유는 군인들이 칼을 쓰는 훈련을 매일 했기 때문인데요 왼손으로 방패를 들고 있는 상태로 오른쪽 허리에 차고 있는 칼을 오른손으로 뽑아서 사용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능숙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칼날에는 종종 소유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전투에 앞서 자신의 칼을 잘 관리하는 일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물은 청동으로 만들어진 바틸룸(batillum)이라 불리는 삽이었습니다. 이 삽은 로마 군인의 개인 장비 품목 가운데 하나였으며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주로 사용된 것으로는 종교의식을 하기 위해 향을 태우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로마군은 이러한 향을 피우는 삽 외에도 굴착용 삽과 곡괭이, 낫등 다양한 개인 도구들도 가지고 다녔는데요 로마는 대량 생산된 다양한 장비들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장비들의 품질은 의외로 좋지는 않았는데요 공화정 후기 특히 마리우스 군제 개혁부터는 군 장비들이 빠르고 저렴한 대량생산 체계에 들어가게 되었고 가난한 시민들이 군대에 유입되면서 부유한 군인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은 오히려 적들보다 품질이 떨어지는 장비들을 가지고 전쟁에 나서야 했습니다.

지금 보이는 비문은 제10군단과 제8군단의 표시가 되어 있는 비문인데요 이 비문은 기원 1세기 혹은 2세기 경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비문에는 "LEG X FRE COH IIX"라고 쓰여 있으며 군단의 상징인 돌고래와 멧돼지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로마 군단은 공화정 시기에는 4200명의 군단병과 부유층에서 모집된 300명의 에퀴테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나중에 개혁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5200명의 군단병과 120명의 보조병으로 조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대 로마는 시대에 따라 군단의 규모도 조금씩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독수리 모양의 아퀼라(Aquila)를 군단의 상징으로 사용하였으며 이 아퀼라의 분실은 심각한 굴욕으로 여겨져 분실하게 되면 군단이 자체적으로 해체되기도 했으며 각 군단은 군단의 이름과 상징물이 새겨진 깃발인 벡실룸(Vexillum) 혹은 시그눔(Signum)을 들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아퀼라를 들고 있으면 사자 가죽, 벡실룸은 곰 가죽, 시그눔은 늑대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었습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물은 바르 코크바 반란이 진압된 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원로원과 로마 사람들이 봉헌한 것으로 여겨지는 텔 샬렘의 승리의 개선문에 있던 부조입니다. 이러한 승전 문은 1부에서 봤던 하드리아누스 청동상이 1977년에 발견된 지 1년 반 후에 인근 제6군단 진영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요 황제의 동상이 발견된 장소에서 매우 가까웠기 때문에 이 문 위에 동상이 서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 비문은 제국 동방의 공용어인 그리스어가 아니라 라틴어로 쓰여 있었다는 사실은 비문 봉헌과 개선문의 건설이 중앙 정부의 주도 아래 결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반란으로 인해서 유대인의 거점 요새 50개가 함락되었고 985개의 마을이 폐허가 되었으며 58만 명의 사망자가 나왔습니다. 또한 수많은 유대인들이 노예로 팔리고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으며 예루살렘은 철저하게 다시 한번 파괴되고 이름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완전히 바뀌고 로마식으로 재건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더욱 강화되는 일이 있게 됩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물은 기원 2세기 초에 사해 남동쪽 끝에 있는 마오자(Maḥoza)라는 마을에 살았던 유대인 여성인 바바타(Babatha)라는 여성의 개인적인 물품들입니다. 여기에는 개인적인 문서들과 결혼과 재산 양도, 후견인 등에 관한 법적 서류들이 많이 발견되었는데요 2세기 초에 살았던 상류층 유대인 여성의 삶을 볼 수 있어서 고고학적인 가치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략 기원 104년 경에 마오자에서 태어난 바바타는 부모가 죽자 아버지의 대추야자 과수원을 물려받았으며 엔게디에 세 곳의 대추야자 과수원을 소유하고 있었는데요 이후에 재혼한 남편인 유다가 죽으면서 남편이 대출받은 돈에 대한 채무 보증금에 따라 바바타의 엔게디 소유지를 압류하게 됩니다. 이후에 재혼한 유다의 첫 번째 부인인 미리암이 사망한 남편의 재산에 대해 바바타를 상대로도 소송이 있었기에 엔게디 법정에 출두하라는 소환장도 있었으며 이후 바르 코크바 반란이 생긴 후에 다른 가족들과 함께 엔게디 근처의 동굴로 피신하면서 그 동굴에서 죽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동굴에서는 20구의 다른 유골도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지금 보이는 흉상은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 혹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를 묘사한 동상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흉상처럼 로마 황제들은 초상을 만들면서 야전사령관들이 입는 군복을 입은 흉상이 많이 제작되었는데요 오늘날로 보자면 대통령 초상을 양복 정장이 아닌 야전 군복을 입은 느낌과 비슷할 것 같습니다. 이러한 군복 초상은 스스로를 위대한 승리자이면서 세계의 정복자로서 황제의 힘과 로마의 전통적인 종교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느데요 그렇기에 제우스의 상징인 번개위에 앉아 있는 독수리의 상징과 메두사의 머리와 한 쌍의 그리핀도 보입니다. 이러한 군대 사령관(임페라토르)의 모습을 흉부 착용자(Thoracatus : 로마 군대의 총사령관)라고 부리기도 하는데요 황제의 흉갑에는 전쟁의 신인 마르스의 모습이 있거나 태양신 혹은 태양 전차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3부부터는 그리스-로마로 이어지는 유물들 가운데 특히 신과 관련된 석상들을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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