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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투어 / 이스라엘 박물관 - 무슬림과 십자군의 성지편 2부

by 톡톡오늘 2022. 5. 2.

기독교가 유럽을 시작으로 급속히 확장되면서 4세기 말부터는 로마 제국의 공식 국교가 되는데요 로마에서의 기독교 정체성을 기반으로 기독교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문화는 서구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토착화되었습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태어날 때부터 기독교 문화가 아닌 불교 문화권으로서 부모님 혹은 조부모, 증조부모는 불교나 유교 문화를 접하면서 살았기에 기독교 문화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는 예술과 문학, 철학, 교육, 과학 등 유럽의 모든 부면에 영향을 주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러한데요 한국도 기독교 문화권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한국은 복합적인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어릴 때부터 기독교를 접하고 자랐다 하더라도 생활 전반에는 유교 문화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스며들어 있기도 합니다. 이제 이스라엘 박물관의 마지막 무슬림과 십자군의 성지 편 2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물은 교회의 회당 유적인데요 램프와 샹들리에, 기타 종교 의식을 위한 대상이나 모자이크 비문 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교회는 유대인 회당과도 상당한 유사성을 보이고 있는데요 건축 설계가 공통된 기원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원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용인하면서 로마 제국에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는데요 4세기 말에는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언되면서 이스라엘 땅은 말 그대로 ‘성지’가 되었습니다. 비잔틴 정부는 성지에서 많은 건축 활동을 시작했고 순례자들이 성지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이 성지에 정착하기로 선택하였고 기독교 인구가 더 지배적인 상황이 되었기에 지금도 기독교의 흔적을 팔레스타인 지역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기독교 정착지의 중심지에는 교회가 세워졌고 내부는 화려하게 장식되었으며 벽은 모자이크와 프레스코로 덮여 있었고 바닥은 다채로운 포장된 돌과 모자이크 카펫으로 덮여 있었는데요 지금의 전시물은 17개의 개별 교회 유적지에서 발견된 부품들을 모아서 하나의 장소처럼 만들어 놓은 곳입니다. 놀랍게도 마치 한 건물에서 온 것처럼 완벽하게 맞아 들었는데요 당대에 비슷한 건축 양식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전시물은 기원 7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에 성전에 있던 일곱개의 촛대가 있는 메노라를 상징물로 만든 것인데요 이처럼 메노라는 기원 70년 제2성전이 파괴된 후에 유대인들의 국가적, 종교적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징물은 기원 4세기에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그 이후로도 인기를 얻게 되었는데요 부적과 같이 영적인 힘이 있다고 믿어져 국가적, 개인적 구원의 상징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메노라는 모자이크로 그려지거나 상징물로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대리석에 양각으로 새기기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메노라는 회당에 설치되었고 의식의 일부로 가지 끝에 있는 기름 램프에 불을 붙이기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물은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크게 입체적으로 만들어진 메노라입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물은 십자군이 사용했던 창날과 칼, 화살촉 등인데요 기원 11세기에서 13세기까지는 십자군이 사용하던 무기나 갑옷은 상당한 유사성을 띄고 있지만 이슬람 세계의 무기와 갑옷은 다양하게 발전하였습니다. 십자군은 기본적으로 휴대용 석궁을 사용하고 있었고 직선 칼을 사용하였으며 서유럽 기사들이 사용하는 창 역시 비교적 비슷한 형태를 띄고 있었습니다. 기원 7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이슬람의 팽창으로 인해 기원 637년에 예루살렘이 이슬람 치하에 들어가고 예루살렘을 순례하던 기독교인들이 이슬람 세력에게 박해를 받는다는 소문이 나면서 성지 회복을 목표로 1096년에 1차 십자군 원정대가 출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은 다른 동기가 있었는데요 오리엔트 지역을 약탈하고자 하는 경제적인 문제가 원정의 가장 큰 동기였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원정을 가면서 지나는 곳마다 약탈을 하였고 심지어 1099년 7월 15일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나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거액의 뇌물을 준 통치자와 호위병만이 남기도 했습니다.

지금 보이는 이 명판은 한 세기 동안의 십자군 전쟁 동안 아스글론이라는 도시에서 겪었던 격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명판에 적힌 아랍어 비문은 1150년에 십자군에 대항해서 파티미드 칼리프에 의해 건설된 방어벽 건설을 기념하고 있는데요 이 비문이 새겨질 당시, 아스글론은 카이로의 파티마 왕조의 이슬람 세력과 성지에 도착한 유럽의 십자군 사이의 국경지대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간헐적으로 휴전과 전쟁을 반복하였는데요 아스글론은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고 1241년까지 다시 기독교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콘월(Cornwall) 백작 아래 십자군에 참가했던 영국 귀족인 휴 웨이크(Hugh Wake) 경의 그 위에 자신의 문장을 다시 새겨 넣은 모습입니다. 그리고 고고학자들은 이 비문도 1000년 앞선 로마의 탁상이었을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후 아스글론은 다시 이슬람에 의해 함락되는데요 누군가에 의해 이 돌은 해자에 던져졌으며 현재 웨이크의 후손은 영국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물은 책을 들고 있는 천사를 묘사한 부조인데요 아마도 마태를 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부조는 벨보아르 요새 2층에 위치한 요새에서 발견되었으며 12세기 중반 프랑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이 요새는 갈릴리 바다 남쪽에 위치해 있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십자군 요새인데요 이슬람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전진할 때 가장 방해가 위치에 있습니다. 이 요새는 1180년 공세를 버텨내기도 했는데요 당시 하틴 전투에서 살라딘이 십자군에게 승리한 후에 벨 보아르를 포위하고 1189년 1월 5일에 수비군이 항복할 때까지 1년 반 동안 버티기도 했습니다. 이후 1219년까지 이곳을 점령하고 있다가 1241년부터 1263년까지 프랑크인들에게 다시 양도되기도 했습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물은 이슬람교도들이 기도할 때 메카 방향을 나타내는 기원 17세기 당시의 모스크 벽의 모습인데요 미흐랍(Mihrab)이라 부릅니다. 15-18세기에는 미흐랍이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었는데요 다양한 색상으로 유약을 바르고 다양한 모양과 크기로 잘린 조각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이 미흐랍을 장식하는 비문은 코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이슬람교인들이 숭배의 중심지인 메카는 아브라함이 건축했다는 전승에 따라 카바 성역에 있는데요 메카의 방향을 알아내기 위해 그리스 천문학자들이 사용하는 삼각법을 이용해서 측정을 했습니다. 이들은 전통에 따라, 메카 방향으로 무덤을 만들고 이슬람 도살업자들은 메카 방향으로 가축을 도살합니다.

이렇게 박물관(영국 박물관, 독일 박물관 섬, 이스라엘 박물관)이 있는 여러 지역을 둘러 보았는데요 사회적으로 코로나로 힘들었던 시간들이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방구석이 아닌 박물관에 직접 가서 보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박물관 연재를 멈추고 당분간? 야외에서의 생활을 만끽하며 지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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