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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보/- 장소

박물관 투어 / 국립중앙박물관 - 가야 2부

by 톡톡오늘 2022. 8. 14.

초기 김수로왕 시절의 가야는 신라와 대등한 국가였는데요 신라 주변의 작은 나라인 음즙벌국과 실직곡국이라는 나라의 영토분쟁을 신라가 아닌 가야가 나서서 해결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중앙집권을 이루지 못하고 지금의 지방자치제도와 비슷한 정치적 분립으로 인해서 고대시대 강국으로 부상하지는 못했는데요 광개토대왕의 남정 때 큰 타격을 입고 서서히 신라에 흡수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신라 진흥왕에 이르러서는 가야 전 지역이 신라에 병합되었습니다. 이처럼 신라에 흡수된 가야인들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큰 힘이 되기도 했는데요 이를테면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 김구해의 증손자인 김유신은 신라의 군 사령관으로서 대 영웅이 되기도 했으며 수천 년의 한국 역사에서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물은 가야의 상형토기입니다. 가야에는 생활토기 외에도 상형토기가 있었는데요 여러가지 사물의 형상을 본떠서 만든 토기입니다. 이러한 토기의 종류에는 동물형 토기와 기물형 토기가 있었는데요 동물형 토기는 오리, 말, 낙타와 같은 모양이었으며 기물형 토기는 집, 수레, 뿔잔, 신발, 배 등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토기는 크게 인물형과 기물형, 동물형으로 나뉘는데요 장식용이나 부장용 등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보이는 토기들은 성산가야와 비화가야에서 출토된 토기들입니다. 경상북도 성주 지역에 있었던 성산가야와 경상남도 창녕 지역에 있었던 비사벌(비화가야)은 금관가야나 대가야처럼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6세기 전의 이른 시기부터 신라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주 성산동이나 창녕 교동 등 주요 고분에서 출토된 금공예품이나 마구, 칼 등은 신라 양식을 띄게 되었고 토기는 여전히 가야의 색깔이 있는 토기들이 출토되었습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물은 가야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들인데요 가야는 바다에 접해 있다는 지리적인 이점과 풍부한 철 자원을 바탕으로 중국, 북방, 왜 뿐 아니라 서역과도 교류를 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최근 백제 지역에서 많이 출토된 닭머리 모양 주둥이를 가진 청자호가 남원 지역 가야 무덤에서 확인이 되어서 죽국의 북조뿐만 아니라 남조와도 교류했음을 알 수 있었으며 청동솥과 청동대야 등은 북방과도 교류를 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왜와의 교류를 보여주는 방패꾸미개와 원통모양청동기, 옥제 화살촉과 갈색 토기가 대표적이며 옥전유적에서는 서역지방의 유리잔이 출토되기도 하였습니다.

가야 사람들의 생활을 알려주는 자료들이 많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무덤이나 생활 유적에서 발견되는 유기물이나 토기 등을 통해 일부 유추할 수 있습니다. 가야 사람들은 민물고기나 고동, 상어, 참다랑어, 닭과 같은 고기류와 팥, 밀, 밤, 복숭아, 호두 등의 곡식과 열매를 먹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날것으로 먹기 어려운 식재료는 솥에 삶거나 시루에 쪄서 먹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가야 집터에서는 시루가 종종 출토되었습니다. 또 가야무덤에서 출토된 짚신모양토기와 바퀴모양토기, 집모양토기 등을 통해 가야 사람들의 생활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수로왕의 금관가야는 김해라는 지역인데요 김해라는 말 자체가 쇠 금자와 바다 해자가 합쳐져서 쇠가 떠다니는 바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처럼 가야는 일찍부터 철을 생산, 가공하는 기술이 좋았는데요 낙랑군부터 일본 규슈까지 철을 수출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러한 가야의 말갖춤과 말 머리 가리개는 당대 높은 수준의 기술력을 볼 수 있는데요 강력한 기병을 가지고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유물입니다.

이제 신라관으로 넘어가서 다양한 신라 유물들을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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