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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투어 / 국립중앙박물관 - 백제 3부

by 톡톡오늘 2022. 8. 10.

백제 하면 또 생각나는 역사가 계백 장군과 5,000명의 결사대입니다. 기원 660년 7월 9일에 5만의 신라군과의 황산벌 전투가 시작되었는데요 황산벌은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미 계백은 전투에 나서면서 백제의 기운이 다했다고 느꼈을 텐데요 처자식들을 다 죽이고 비장한 마음으로 출발하였습니다. 그리고 7월 9, 10일 신라군의 4차례 공격을 모두 패퇴시켰는데요 신라군은 사기가 떨어지자 화랑이이었던 반굴(김유신의 조카)과 관창(김품일의 아들)을 돌격시키게 됩니다. 둘 다 전사하였는데 관창은 한번 풀려났다가 다시 잡혀 목이 베어져 말에 얹혀 보내집니다. 여기에 신라군은 전의를 불태우며 마지막 공세를 펼쳐서 계백의 결사대는 전멸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사비성은 나당연합군에 함락하고 웅진성으로 달아난 의자왕도 예식진에 의해서 체포되고 당나라에 항복하여 백제는 멸망하게 됩니다. 사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에 의자왕에 대한 역사(예를 들어 삼천궁녀는 당시 인구수를 볼 때 불가능한 숫자로 보입니다)도 부풀려진 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의자왕이 집권할 때부터 백제 내부의 권력 다툼과 내분으로 멸망의 조짐이 있었습니다. 이제 백제 유물에 대한 마지막 3부를 보겠습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물은 1948년에 충청남도 부여읍 관북리 도로변에서 발견된 사택지적비라는 비석인데요 현재 국립 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복제본입니다. 높이 102cm, 너비 38cm, 두께 29cm이며 화강암에 가로 세로 정간으로 글자를 음각하였습니다. 이 비석은 의자왕 14년(654)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백제 후기의 최고 귀족 가문 중 하나인 사택 씨 출신으로 의자왕 재위 당시에 최고위직인 대좌평을 역임한 인물입니다. 비문은 사택지적이 말년에 이르러서 지난날의 영광과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하면서 불교에 귀의하고 사찰을 건립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요 당대 백제의 높은 문화 수준과 불교가 번성했음을 보여주는 유물입니다.

백제에 대한 유물과 기록 등 사료가 현재 많이 남아있지는 않은데요 금석문이나 목간, 토기, 기와 등에 여러 글자를 남겨 놓아 고대 사회를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금석문은 칠지도, 무령왕릉 묘지석, 창왕명석조사리감 등이 대표적인 사료입니다. 또한 목간은 가늘고 긴 나무판에 글씨를 쓴 것인데요 종이가 보급되기 이전에 종이 대신 사용된 것이며 먹으로 쓴 묵서 목간이 일반적으로 출토되었지만 종종 칼로 새긴 것도 발견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목간은 간단한 문서 기록이나 꼬리표, 낙서나 연습용 등으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풍납토성에서도 문자가 새겨진 토기나 벽돌이 출토되어서 한성 백제시절에도 한자가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물은 보물 343호로 무늬벽돌(Patterned Bricks)인데요 부여 외리에서 여덟 종류 출토되었습니다. 네모 모양의 벽돌로 크기가 일정하고, 네 귀퉁이 측면에는 홈이 파여 있어서 서로 연결하고 고정할 수 있었습니다. 회화성이 뛰어나기에 당시 예술과 건축, 종교와 사상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유물입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물은 백제의 기와인데요 웅진기와 사비기를 거치면서 연꽃무늬를 주로 새긴 백제 특유의 양식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웅진기에는 전통적으로 전해오던 기술의 바탕 위에 새로이 남조 양의 기와 제작기술을 받아들여서 이전과는 다른 특유의 기와를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사비로 수도를 옮긴 뒤에는 도성 안팎에 많은 사찰이 세워졌는데요 그러면서 기와 제작도 활발해졌고 양식도 다양해졌습니다. 백제의 기와 제작기술은 신라와 왜(일본)에도 전해져서 왜의 아스카 기와 발전에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삼국시대에는 지금 보이는 전시물인 거대한 항아리를 무덤으로 썼던 ‘독널무덤’이 유행하였는데요 토기에 죽은 사람이나 뼈를 담아 묻었습니다. 삼국시대에는 분구묘라 부르는 큰 무덤에 묻었는데요 4세기 무렵에는 아가리가 유독 넓은 모양이었지만 5세기부터는 몸집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나주 오랑동에서는 5세기 무렵에 큰 독널을 구웠던 가마터가 발견되기도 했는데요 당시 독널을 전문적으로 만들고 구워냈던 장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백제편 3부를 마치게 되었는데요 다음 편에서 가야와 관련된 유물을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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