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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투어 / 국립중앙박물관 - 발해(마지막 편)

by 톡톡오늘 2022. 8. 26.

발해는 기원 698년부터 926년까지 228년간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위치했던 왕국이었습니다. 신라와 함께 남북국시대를 열었던 국가였는데요 한반도를 중심으로 했던 국가가운데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국가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아있는 기록이나 정보가 부족하기에 사실 밝혀진 내용이 많이 있지는 않은데요 역사적으로 어느 국가에 귀속될 것인가에 대해 베일에 쌓여 있는 점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려 했다는 것은 확실해 보이는데요 발해 초기에는 자신들을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나타내기 위해 고려로 칭하기도 했고 대외적으로도 그렇게 불렸습니다. 하지만 발해의 왕족인 대씨의 출신과 관련해서는 어디 출신이고 어느 가문인지조차 확실하지가 않은데요 고구려계인지 말갈계인지도 확인할 길이 없기에 국가 군주와 관련해서는 추정하고만 있습니다. 발해의 지배층도 고구려계와 말갈계등이 함께 섞여있었기에 정확히 보자면 다민족 국가였다고 볼수 있겠네요. 전성기때는 중국에서 '해동성국'이라 부르며 바다 동쪽에 융성한 국가로 불렀르며 실제 발해 내부적으로 고구려, 돌궐, 말갈, 거란족 등이 모두 함께 있었으니 시너지가 난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이후 민족간의 갈등이 생겼을 때는 멸망의 단초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멸망의 원인도 정말 다양하게 추정하는데요 한때 백두산 폭발로 발해가 멸망했다고 했지만 이 설은 완전히 폐기되었고 유목민족(거란족)인 요나라에 의해서 수도가 함락되면서 멸망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지금의 전시물은 목조건축의 용마로 양쪽 끝에 높게 부척했던 장식기와이며 녹색유약이 발라져 있었기에 녹유치미라 불리는 유물입니다. 지금의 전시물은 중국 흥룡강성 상경용천부 제9절터에서 출토되었으며 현재 북한에 원본이 있고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것은 복제품입니다. 치미는 주로 침수나 화재와 같은 재난을 방지하고 건물의 위용을 드러내기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에서는 총 10개의 절터가 있었으며 그 가운데 제9절터와 제1절터에서 발해의 치미가 출토되었습니다. 앞으로 보게될 발해의 전시물은 모두 해외에 원본이 있는 복제품이라고 생각하시면 될것같습니다.

지금의 전시물은 중국 헤이룽장성 니안시에서 1933-34년 조사에서 발굴된 용머리상인데요 상경용천부 궁궐터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이 전시물 역시 원본은 일본 도쿄대학에 소장되어 있고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복제품인제요 발해 특유의 형태와 조각기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귀밑까지 찢어진 입과 날카로운 이빨, 툭 튀어나온 두 눈과 머리에서 귀 뒷부분까지 이어진 갈퀴 등을 통해서 용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용의 의미가 왕족을 상징하기에 왕궁에는 국가별로 이러한 고유의 용문양을 새겨서 황실을 나타내었습니다.

지금의 전시물은 와당이라 부르는 지붕에 얹는 원형 기와인데요 이 기와는 고구려와 발해의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발해는 고구려인과 말갈인으로 구성된 나라였지만 고구려 계승을 자처한 국가였음 당의 지방 세력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황제국을 지향한 독립 왕조였습니다. 발해인들은 스스로를 고구려 땅에 건국했다는 것을 표명하며 고구려와 부여의 전통을 계승한 국기임을 천명하였는데요 대표적인 예가 기원 758년에 ‘견고려사’ 목간과 속일본기의 ‘발해는 옛 고구려국이다’라는 표현입니다. 이 내용은 당시 일본도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기이을 인정했음을 보여주고 있스니다. 평양 원오리 절터에서 출토된 고구려 불상과 발해 수도에서 출토된 불상을 비교해 보면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알 수 있으며 발해 수도에서 출토된 지금 보이는 와당 역시 고구려와 문화적으로 유사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보이는 목간은 고대 일본의 궁성이었던 헤이조 궁터에서 출토된 목간인데요 길이는 24.8cm, 너비 2cm, 두께 0.4cm이며 모두 22자가 적혀 있습니다. 이 목간에는 발해를 고려라 칭하며 당대 일본에서 발해를 고려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을 실증하는 가장 오래된 사료입니다. 이 목간을 통해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의 전시물은 발해의 상경용천부(헤이룽장성 무단장시 닝안시)에서 출토된 전시물입니다. 발해 5경이라 해서 상경용천부, 중경현덕부, 동경용원부, 서경압록부로 구성된 행정구역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지역에는 일종의 지방자치도 허용되었느데요 중앙집권이긴 했지만 별도의 외교 활동도 허용되었던 기록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발해 초기 수도는 동모산(현재 중국 길림성 돈화시 성산자 산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문왕때인 기원 756년에 수도를 중경현덕부에서 상경용천부로 천도한 이후에 질서있는 계획도시를 건설하게 되었는데요 이 성터에서는 온돌시설이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가로 4600m, 세로 3400m 크기의 도시였으며 중국 당제 도성을 본떠서 만든 도시라 한반도를 기반으로 한 다른 왕조의 도성과는 다른 느낌으로 설계된 것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발해는 건국 이후에 적극적인 외교를 통해서 당과 통일신라, 일본과 같은 동아시아 주변 국가들과도 우호관계를 맺었습니다. 특히 동경이나 남경, 서경과 같은 거점도시를 설치하고 신라도, 일본도, 거란도, 영주도, 조공도라는 교통로를 열었는데요 이 교통로는 외교만이 아니라 아시아 물류 유통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발해는 주변 세계와의 교류를 통해서 새로운 문화나, 정치, 유학, 예술 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하기도 했으며 그로 인해 주변국가에서는 발해의 높은 문화수준을 가리켜 해동성국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고려와 조선의 전시실을 구글스트리트뷰에 개방하지 않았습니다. 고려와 조선 유물을 보기 원하신다면 직접 방문하셔야 할텐데요 사실 화면으로 보는 것보다 직접 가서 보는것을 항상 추천드리며 모든 전시물들을 직접 가서 둘러본다면 훨씬 재밌는 시간이 되실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소개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되는 박물관들이 몇개 남아있기는 합니다. 공부를 좀더 많이 해야 하는 고생물학과 관련되어 있기도 해서 조금 망설여지네요. 아마도 안할 가능성이 70% 이상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제 다시 실제 여행을 떠나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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