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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투어 / 국립중앙박물관 - 통일신라 2부

by 톡톡오늘 2022. 8. 24.

통일신라는 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귀족 간의 권력투쟁이 치열해지고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하게 되는데요 골품제의 고착화로 왕족과 귀족들은 사치와 향락에 국가 재정이 거덜 나고 백성에 대한 수탈을 심해지면서 피지배층에 의한 반란이 잦아지게 됩니다. 중앙 정부는 그러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 호족들의 힘을 키워주게 되는데요 결국 888년에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반란이 일어나고 지방 호족들이 각각 나라를 건국하게 되는데 궁예는 후고구려를 견훤은 후백제를 건국하며 후삼국시대가 도래하게 되었습니다. 신라는 이후 국가 동력을 완전히 상실하면서 고려(후고구려)와 후백제의 싸움에서 고려로 힘이 기울자 당시 신라 왕이었던 경순왕은 935년에 고려에 나라를 바치면서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나라가 망할 때는 순식간이라는 걸 알 수 있는 역사이네요. 이제 신라 유물을 계속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보이는 불상은 통일신라 시대에 철로 만들어진 철조여래좌상이라는 철불인데요 8세기 후반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불상은 놀랍게도 그리스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한데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인도 원정 이후에 인도를 중심으로 헬레니즘과 인도 토착 양식이 결합된 간다라 양식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초기 불교도들은 불상을 만들지 못하고 주로 탑을 지어서 부처를 기념했는데요 알렉산드로스를 따라 인도로 유입된 그리스인들이 신상 제작하는 것에 영향을 받아서 인체를 아주 세심하고 아름답게 표현하는 방식으로 불상을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그리스 문화가 전 세계로 퍼져나간 것을 생각해볼 수 있네요.

이 그릇은 불교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뼈 담는 그릇인데요 뚜껑과 몸체를 연결하는 고리 달린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뼈 담는 그릇을 담는 바깥 그릇은 대부분 토기이지만 이처럼 돌로 만들어진 것도 있는데요 안에 있는 단지 그릇 표면에 연유 계통의 녹유를 발라 구워서 문양을 새긴 나무판과 같은 도구로 그릇 전체에 도장을 찍어서 문양 효과를 내었습니다. 그래서 녹유 토기라 부르는데요 이를 담는 돌함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표면을 각지게 깍아서 장식 효과를 내었습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물 매우 이국적인 느낌의 전시물인데요 실크로드를 통한 무역이 성행하면서 중국에서 유입된 도기들입니다. 당삼채낙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요 다양한 색의 유약 중에 백색과 녹색, 갈색 등 세 가지 색을 주로 사용하기에 그렇게 부르며 항아리나 쟁반 같은 그릇뿐 아니라 동물상이나 인물상으로도 제작되어 주로 무덤에 묻는 부장품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주로 신라의 상류층 부장품으로 사용되었으며 실생활에서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낙타 모양을 보면 봉이 두 개가 있는데요 고비사막이나 몽골, 알타이 지역 등 아시아 내륙을 동서로 연결하는 교통수단으로 사용된 쌍봉낙타의 모습이며 서역 사람 모습은 중국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에는 이슬람 사람들과 상인들이 드나드는 국제 도시였기에 그 당시 서역인들의 모습을 모델로 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의 전시물은 석탑 기단부에 여덟 명의 신을 새긴 팔부중상의 일부인데요 아수라와 건달바라는 신의 모습입니다. 동양의 신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로 퍼져나간 신들과도 연관이 깊은데요 그 가운데 이 아수라 신은 조로아스터교의 아후라 마즈다(오르마즈드)와 관련이 깊습니다. 이 신은 선의 신으로 인간과 세상의 모든 선한 것들을 창조했다고 하는데요 이란의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고대 로마에도 전파되어 미트라 신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신은 우주와 우주의 법칙과 질서를 창조한 신이기도 한데요 힌두교에도 영향을 주어 아수라 신이 됩니다. 불교에서는 힌두교에서 불교로 개종한 신으로 칭하여 머리 셋에 팔 여섯의 신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오른쪽의 건달바라는 신은 인도의 간다르바에서 온 신인데요 물에서 태어나서 하늘과 땅을 자유로이 돌아다니며 인간이나 신들에게 장난을 걸고 성생활이 자유로우며 질투가 많은 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음악을 사랑하고 향기를 먹고사는 등 자유로운 존재였는데요 한국에서는 일은 안 하고 빈둥댄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변질되면서 놀고먹는 사람들을 ‘건달’로 칭하게 되었다는 통설이 있습니다.

이 전시물은 김유신 장군 묘 주위에서 출토된 곱돌로 만든 말과 토끼의 납석제십이지상입니다. 영어권에서는 Chinese Zodiac이라 해서 메소포타미아(수메르) 종교에서 유래한 황도 12궁(별자리)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는데요 바빌로니아에서 이집트, 그리스, 인도로 가서 중국까지 넘어온 것이 정설입니다. 황도 12궁(조디악)이 그리스어로는 ‘작은 동물들로 이루어진 원’이라는 의미이기에 12지와 연결된 각각의 동물이 있는 것이 오히려 어울리는 의미로 보입니다. 김유신 장군 묘의 십이지상은 무장의 복장을 하고 있으며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무덤 내부에는 토용과 토우 등을 함께 묻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전시물은 신라가 다른 나라와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입니다. 통일신라는 당으로 견당사(신라에서 당나라로 보낸 사신)와 숙위학생(당나라 국립교육기관인 국자감에 파견했던 유학생), 구법승(불교의 성지순례를 목적으로 가는 승려들)을 파견하고, 신라방(지금의 한인타운 같은 신라인 집단 거주지역)의 설치를 통해서 당과 밀접하게 교류했습니다. 또한 나라시대 일본과도 긴밀한 외교를 맺었는데요 일본 도다이 사의 쇼소인에 보관된 소장품 중에는 통일신라와 일본 사이에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유물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경주 괘릉과 흥덕왕릉을 지키는 무인상은 서역과의 교류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통일신라 유적에서 발견되는 도자기는 중국에서 수입된것으로 대부분 중국 저장성(항저우가 있는 중국 동부) 월요에서 제작된 것이 많습니다. 특히 수도인 경주에서 출토된 월요 청자의 대부분은 품질이 뛰어난 것이며, 그 가운데 상당수는 월요가 만든 최고 경지의 청자인 비자색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월요청자는 이후에 고려청자의 도자 기술의 기원이 되어서 고려의 청자문화가 꽃피우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통일신라 유물을 둘러보았는데요 이제 며칠 뒤에 통일신라 북쪽에서 고구려를 계승해서 바다 동쪽에 있는 융성한 국가라는 의미로 해동성국이라 불렸던 발해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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