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차지한 이후에 백제와 고구려는 국경선이 분리되게 되는데요 이후로 백제와 고구려 양 전선에서 전쟁을 벌여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이후 시간이 흘러서 642년에 백제와의 대야성 전투에서 대야성을 빼앗기면서 김춘추는 고구려로 가서 연개소문과 군사 동맹을 제의하는데요 백제와 손을 잡은 고구려는 신라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신라는 국가 존재의 위협을 받고 왜와도 동맹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했으며 결국 당나라까지 건너가 동맹을 제의하게 되는데요 당태종은 김춘추를 환대하고 동맹을 체결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백제, 고구려, 왜, 말갈이 연합하면서 국제전이 벌어지게 되는데요 역시 국력이 강했던(당대 최강국) 당나라와 연합한 나당연합군에 의해 연합군은 차례로 멸망되게 됩니다. 백제는 기원 660년에 고구려는 기원 668년에 순서대로 멸망했으며 전쟁이 끝나자마자 이 신라와 당나라 두 연합국은 바로 적국이 되었습니다. 신라와 당나라의 전쟁은 매소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를 끝으로 당나라는 신라를 포기하고 철수하기 시작하는데요 이후 본격적인 통일 신라 시대가 개막하게 됩니다. 이제 신라의 남은 유물을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의 비석은 진흥왕 순수비인데요 신라 제24대 왕인 진흥왕이 6세기 중반에 고구려와 백제를 한강 유역에서 밀어내고 영토를 선포하기 위해 북한산 비봉 정상에 설치하였습니다. 이 비석은 오랜 기간 잊혀져 있다가 조선시대 후기의 실학자인 추사 김정희가 비봉 정상에서 비문을 해독하고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내게 됩니다. 이 비문의 측면에는 김정희가 비문 옆면에 해설을 새겼는데요 오른쪽 방향으로 한 번만 움직이면 그 글씨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비문은 1972년 8월 17일 경복궁으로 옮겨진 이후에 1986년 8월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비석의 뒷면으로 가면 6.25 전쟁 후반에 있었던 고지전에서 맞은 총탄 자국도 있어서 한국 근대사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건립 연도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진흥왕이 기원 555년에 북한산을 방문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그때쯤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기록에 있는 남천군주라는 관직이 568년 이후에 있었기에 그 이후로 추정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물은 금속유물에 새겨진 글자인데요 5-6세기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입니다. 신라에서 문자가 사용된 초기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들이며 허리띠 장식과 청동그릇 등에 새겨진 부인대, 대부 등의 글씨는 문장이라기보다는 단어로 된 문자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호우총과 서봉총에서는 광개토지호태왕이나 태왕 등과 같이 고구려 왕을 지칭하는 용어와 제작연대, 제작자, 용량 등 여러 내용이 새겨진 그릇이 출토되어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비석은 포항 냉수리 신라비라 불리는 비석입니다. 1989년 4월 6일에 포항 신광면 냉수리에 있는 이상운씨 소유의 밭에서 밭갈이를 하던 중에 평소에 걸림돌이었던 이 바위를 파내서 빨랫돌로 사용하려고 집으로 운반한 후에 흙을 물로 씻어보니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행정기관에 신고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화강암의 앞면, 뒷면, 윗면에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요 신라의 역사를 정확히 아는데 큰 도움이 되는 비석입니다. 내용은 진이마촌이라는 마을에 절거리, 말추, 사신지라는 사람이 어떤 재물의 소유권을 두고 분쟁이 나서 지증왕 이전에 2명의 왕에 의해 절거리의 조상으로 추정되는 자가 소유권을 인정받게 되는 내용입니다. 나중에 절거리가 죽게 되면 동생 아사노나 동생의 아들 사노가 재물을 가지고, 말추와 사신지는 트집을 잡지 말라는 내용과 트집을 잡으면 중죄로 처벌할 것이며 얼룩소를 제물로 잡아 하늘에 맹세까지 했다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재산과 상속 문제를 신라 조정이 개입해서 판례를 넣은 것인데요 재물에 대한 세금을 징수할 권리에 대해 쓴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물은 경주 분황사 금당에서 사용했던 연꽃보상화무늬수막새인데요 보상화라는 의미는 모란을 비롯해서 여러 꽃과 잎을 합쳐 그린 상상 속의 꽃무늬를 가리키며 페르시아 사산조 식물무늬에서 유래한 것이라 합니다. 보상화 주변에는 인동무늬로 장식되어 있고 테두리에는 구슬무늬가 둘러져 있습니다. 그 아래에는 새무늬암막새인데요 다섯 개의 보상화 무늬를 엇갈리게 배치했고 그 사이에 마주 보는 한쌍의 새를 묘사하였습니다. 모래 알갱이가 많이 섞인 거친 점토를 단단하게 구워서 만들었으며 수막새와 암막새를 번갈아서 좌우로 연결해서 처마 끝을 이루게 했습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물은 사찰에 사용된 연꽃 무늬 수막새인데요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이후에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습니다. 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전통 신앙이 이루어졌던 장소에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신라 최초의 사찰인 홍륜사는 신성한 장소였던 천경림의 나무를 베어낸 곳에 세워졌으며 최대의 사찰인 황룡사는 원래 궁궐이 만들어질 장소에 건립되었습니다. 사찰은 전통 신앙을 대신해서 신라인들이 불교를 숭배하고 의식을 행하는 장소로 바뀌게 되면서 국가 주도 아래 크고 화려하게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연꽃은 동양 문화권에서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요 인도에서는 연꽃이 신을 상징하며 힌두교의 브라흐마가 연꽃 위에 앉은 형상을 볼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진흙 속에서 깨끗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해서 자비와 지혜를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하며 도교의 신도 연꽃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주고 유교 역시 깨끗한 꽃을 피운다 해서 절개를 중시하는 선비의 기풍과 비교하기도 합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물은 뼈단지인데요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이후부터 불교식 장례 문화인 화장이 새롭게 시행되기 시작했습니다. 화장은 장례 절차를 간소화시키고 전통적으로 시신을 묻는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데요 시신을 널이나 덧널에 묻는 복잡한 방식에서 벗어나서 화장한 인골을 담아 묻기 위한 화장 무덤용 뼈단지를 제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뼈단지는 뚜껑이 있는 모양이 많이 이용되었으며 다양한 형태에 화려한 무늬로 꾸며진 전용 뼈단지도 유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신라시대에 대해 살펴보면서 삼국시대는 끝이 났는데요 며칠뒤에 남북국 시대였던 통일신라와 발해의 유물도 이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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