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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투어 / 이스라엘 박물관 - 그리스인, 로마인, 유대인편 2부

by 톡톡오늘 2022. 4. 20.

유대 지역을 지배하던 메디아-페르시아에서 기원전 332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이 지역으로 진군하면서 지배 세력이 바꾸게 되는데요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알렉산더가 예루살렘에 다가오자 유대인 대제사장은 그를 영접했고 전광석화 같은 그리스의 정복 활동이 다니엘의 예언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점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배세력이 바뀌는 와중에도 예루살렘은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고 알렉산더 사후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기원전 198년에는 시리아에서 통치하고 있던 안티오코스 대왕에 의해서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고 이후에 기원전 168년에는 안티오코스 4세가 예루살렘 성전을 제우스에게 봉헌하고 제단을 더럽히는 일이 계기가 되면서 마카베오가(하스몬가)의 반란으로 독립하게 되었습니다. 그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이후에도 전시물을 보면서 다시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보이는 초상은 알렉산더의 모습을 조각한 것인데요 고전에 의하면 알렉산더는 자신의 모습을 남기기 위해 소수의 예술가들을 선정하였고 조각가 리시포스와 화가 아펠레스와 같은 유명한 예술가들을 통해 초상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그 당시 원본은 현재 남아있지는 않지만 이후에 동전이나 벽화 등 다양한 곳에서 초상이 남아 있는데요 대부분 알렉산더가 사망 후에도 오랜 기간 제작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유사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알렉산더는 당시 혁신적으로 항상 깨끗한 면도를 하였는데요 이전의 모든 그리스 정치인과 통치자들은 초상화에 수염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렇게 면도를 하는 왕실의 유행은 이후로도 500여 년간 지속되면서 로마 황제에까지 계승되었다가 트라야누스 시대가 끝나고 하드리아누스부터 다시 수염을 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알렉산더는 헬레니즘 왕권의 상징으로 머리에 리본을 묶은 최초의 왕이기도 한데요 그의 초상은 역동적인 머리카락과 약간 위로 향하는 시선으로 묘사하여 영웅적인 스타일로 만들어졌습니다.

지금 보이는 컵은 페르시아의 술잔과 비슷하게 생긴 그리스 술잔인데요 1.5-2리터 용량의 술잔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상당히 많은 양의 술을 마셨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컵입니다. 그리스인들은 다양한 축제에서 과음을 하면서 해방감을 느끼려 하였는데요 소외된 하층민들에게는 사회적 제약 없는 분위기를 주기에 이러한 축제들을 즐겼으며 이후에 점점 과격행위로 발전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러한 축제는 로마시대에까지 전해지다가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이교 숭배 행위를 금지하면서 이러한 축제 역시 점점 쇠퇴해지게 되는데요 이러한 흥청망청한 파티는 지금도 세계 전역에서 즐기는 하나의 요소이며 사람들에게 해방감을 준다는 점에서 고대나 현대나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벽장 안에는 그리스 신을 묘사한 조각들인데요 그리스인들은 정말 놀라울만큼 많은 신들을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신들은 서로 언쟁하고, 싸우며, 심지어 서로를 대항해서 음모를 꾸미기도 했는데요 이들은 사람과 같이 음식도 먹고, 잠도 자며, 신들끼리 혹은 사람들과 성관계를 하고, 가정을 꾸리기도 했으며 유혹도 하고 강탈도 하였습니다. 이 신들은 거룩하고 불멸이라 생각되었지만 온갖 속임수와 범죄도 저지를 수 있었고 사람들 가운데서 눈에 보이게도 혹은 보이지 않게도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신화의 주신들 외에는 신성과 인간성을 함께 지니고 있는 반신반인도 있었는데요 이들을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고 이러한 반신반인들은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만 불멸은 아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신화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와 흡사한 점이 많았고 심지어 성서에 묘사된 노아의 홍수 이전의 세계와 비슷하다는 점도 흥미로운 점인 것 같습니다.

여기 나오는 비문은 셀레우코스 4세(Seleucus IV)가 올림피오도루스(Olympiodorus)를 코엘레 시리아(Coele-Syria) 속주와 포이니케(Phoinike) 속주 성역의 감독자로 임명하기로 한 결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포이니케 속주는 고대 유대인들이 살던 땅이 포함되어 있었는데요 유대인들은 종교적 자치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는 사건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시기 전인 안티오코스 3세 시절인 기원전 222-187년 통치 기간 동안 셀레우코스 제국에서는 이 지역의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는데요 광범위한 종교적 자치권을 허용하였습니다. 하지만 셀레우코스 4세부터 제국에 돈이 바닥나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협정을 위반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성전은 돈을 보관하는데 가장 안전한 장소였기에 총독 헬리오도로스를 파견해서 성전 자금을 몰수하려 했는데요 이 비문에는 신의 개입으로 중단되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후 10년 뒤에는 안티오코스 4세 때 에피파네스의 종교칙령을 통해서 헬레니즘 종교를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고 예루살렘의 성전을 제우스 신전으로 바꿨는데요 이러한 일로 하스모니아(마카베오) 반란이 발발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보이는 비문은 나팔 부는 장소(Trumpeting Place)라는 비문으로 히브리어로 ‘나팔 소리가 나는 곳으로(לבית התקיעה, "Lebeit Hatekiya")’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첫 번째 단어는 ‘장소로’로 번역되고 두 번째 단어는 ‘나팔 소리’로 번역되어 ‘나팔 소리가 나는 곳으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보이는 조각은 복제품인데요 원본은 헤로디아 거리에서 발견되었으며 성전산의 남서쪽 모퉁이에서 떨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비문은 제2성전시대에 안식일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나팔을 불던 제사장들을 위한 안내표시판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유대인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유대 전쟁사를 통해서 성전 일부를 묘사할 때 제사장 가운데 한 명이 나팔을 불어 안식일 오후와 인식일이 끝나기 전에 백성들에게 일을 멈추게 하고 다음날 다시 노동을 시작할 수 있도록 나팔을 불어 안식일을 경건하게 보내도록 했음을 적기도 하였습니다.

이어지는 3부를 통해서 이어지는 전시물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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