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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투어 / 이스라엘 박물관 - 그리스인, 로마인, 유대인편 4부

by 톡톡오늘 2022. 4. 22.

예수의 생애에 대한 기록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 외의 역사 기록에도 존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고대 로마의 가장 유명한 역사가 중 한 명인 타키투스(기원 56년경-기원 120년)는 자신의 저술물인 연대기에서 기원 14-68년 사이의 로마 제국 역사를 저술했는데요 기원 64년에 대화재가 일어나 로마를 황폐시켰을 때 네로 황제에게 책임이 있다는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이 크리스투스(그리스도)에게서 유래한 것이며 그는 티베리우스 통치 당시 행정 장관인 폰티우스 필라투스(본디오 빌라도)의 손에 처형당했다고 적었습니다. 또 다른 로마 역사가인 수에토니우스(기원 69년경-기원 122년 이후)는 황제들의 생애라는 저술물에서 로마를 다스린 처음 11명의 황제들의 재위 당시 사건을 기록했는데요 그 가운데서도 클라우디우스 황제에 대한 기록에서 로마의 유대인들 사이에 일어난 소동이 예수에 관한 논쟁으로 생긴 것으로 적었습니다. 그는 크레스투스(크리스투스)의 선동으로 유대인들이 끊임없이 소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클라우디우스는 유대인을 로마로 추방했다고 적기도 했습니다. 이제 실제 이스라엘 박물관에서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들을 통해서 예수가 살던 당시를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보이는 비문은 라틴어로 본디오 빌라도라는 이름이 나온 비문인데요 1961년에 카이사레아(Caesarea) 지역을 발굴하면서 로마식 극장이 있던 지역에서 나온 비석입니다. 이러한 비문에는 폰티우스 필라투스 그리고 티베리에움이라는 라틴어 이름들이 있었습니다. 내용은 본디오 빌라도가 티베리우스를 기리기 위해 헌납한 건물에 대한 언급 되어 있는데요 ‘위대한 신들에게 (이) 티베리에움을 유대 장관 본디오 빌라도가 봉헌한다.’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유명한 이유는 성서에서 예수의 처형을 허가한 인물이기도 한데요 기원 26-36년까지 유대 지역에서 로마의 다섯 번째 총독이었습니다. 또한 본디오 빌라도에 대한 다른 기록도 있는데요 성서가 완성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의 기록에 티베리우스의 이름과 함께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도 언급되는데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와 관련하여 타키투스는 ‘그 이름의 출처인 크리스투스라는 사람이 티베리우스 통치 때에 우리의 행정 장관인 폰티우스 필라투스의 손에 극형을 당하였다’고 기술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보이는 유골함은 ‘하가콜의 아들 여호카난’이라는 사람의 것인데요 그의 이 석회암 유골함의 앞면에는 히브리어로 그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히브리어 יהוהנן בן חגקול) 이 인물이 주목을 받은 이유는 손목에 가까운 팔의 요골 뼈에 못에 긁힌 자국이 있는데 1세기 당시에 사형을 당하면서 못에 박힌 흔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못에 박아서 처형을 시키는 관행은 페니키아인들의 관행이었는데요 콘스탄티누스 시대가 되어서야 제국 내에서 이러한 관행이 폐지되었습니다. 이러한 형벌은 대개 노예나 천한 신분의 범죄자들에게 내려지는 형벌이었기에 이러한 형벌을 받은 경우는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으며 모욕의 상징으로도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이 인물은 그렇게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예로운 매장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학계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물은 못이 박혀 있는 발꿈치 뼈를 보여주는데요 11.5센티미터 길이의 쇠못이 박힌 사람의 발꿈치뼈의 모형입니다. 1968년에 발굴된 이 유골의 주인은 로마 시대 사람의 것으로 여겨지는데요 죄수를 처형할 때 못을 사용했을 것임을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증거입니다. 이러한 못이 박힌 유골은 시신이 부패되고 남은 뼈들을 넣어두는 석재 유골함에서 발견되었는데요 못을 박는 동안 못의 끝이 구부러져 제거되지 않고 함께 넣어진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의 기브앗 하미브타르에 있는 동굴에서 화려한 모양의 유골함이 발견되었는데요 동굴 벽에 새겨진 지금 보이는 아람어 비문에 의하면 동굴이 아바(Abba)라는 사람의 소유로 언급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비문에 의하면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아바는 바빌론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가 태어난 도시로 돌아왔을 때 아바는 유다의 아들 맛다디아(Mattathiah)라는 사람의 유해를 가져와 이 동굴에 묻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고고학자들을 흥분시킨 것은 바로 이 맛다디아(Mattathiah)라는 이름인데요 맛다디아는 안티고누스 2세 마타티아스로 확인되었는데요 마카베오 반란에 의해서 셀레우코스 왕조가 축출된 후에 실질적으로 유대 지역을 지배했던 하스모네 왕조 가문의 마지막 왕이었습니다. 고대 문학 자료에 의하면 안티고누스는 로마의 마르크 안토니우스에 의해 처형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물은 예루살렘의 성전 산 근처에서 발견된 로마의 이정표인데요 라틴어로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그리고 제10군단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비문에는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아들 티투스가 유대인의 반란 집압 당시 로마군 사령관으로 언급되어 있다가 의도적으로 지워진 것으로 보이며, 유대 총독인 플라비우스 실바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비문은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마사다를 정복한 제10군단의 병사들이 새긴 것으로 보입니다. 이 비문에서는 플라비우스 실바를 마사다의 승리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지금 보이는 유물은 마사다에서 발굴된 유물인데요 미늘 갑옷과 신발이 보이고 있습니다. 이 마사다 지역은 기원 73년에 마지막까지 저항하다 점령된 유대인 요새였는데요 숨어있던 두 명의 여자(노인 한 명)와 다섯 명의 어린아이만을 제외하고 모두 집단 자살했던 장소로도 유명합니다. 이 요새는 기원 66년 유대인 반란이 있기 전까지 로마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던 장소였는데요 마사다가 외진 장소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헤로데는 이곳에 겨울 궁전을 건축하였습니다. 심지어 온수 목욕이 가능할 수 있도록 수도 시설을 갖추어 놓았고 대규모 무기 저장고를 만들어 놓았는데요 열심당원들이 기원 66년에 야이로의 아들 엘르아살의 지휘를 받는 자객들은 마사다를 점령한 후로 로마 수비대를 대량 학살하였습니다. 하지만 이후 예루살렘이 멸망되고 플라비우스 실바의 로마 제10군단이 이 요새로 진격해 왔는데요 요새까지 이어지는 길이 197미터에 높이 55미터나 되는 인공 경사로를 쌓은 뒤에 공성퇴를 배치해 전진하였습니다. 그러자 마사다의 열심당원들은 먼저 자신의 가족을 모두 살해한 뒤에 다른 사람을 죽일 열 사람을 제비 뽑아 처자식의 시체 옆에 누워 그 시신들을 팔로 껴안은 다음 다른 사람이 모두 살해하였고 나머지 사람들도 계속 같은 방식으로 계속 살해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자와 어린이를 포함해서 960명이 모두 희생되었는데요 로마군이 이미 요새에 도착했을 때는 이런 끔찍한 상황이 끝난 뒤였습니다.

이제 1차 유대 반란이 끝나고 로마의 통치가 시작되었는데요 다음 로마의 통치편에서는 유대 지역에서의 로마 유물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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