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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보/- 장소

방구석 투어 / 이스라엘 박물관 - 그리스인, 로마인, 유대인편 3부

by 톡톡오늘 2022. 4. 21.

헤로데(헤롯) 대왕은 안티파트로스(안티파스) 2세가 아내인 키프로스를 통해 얻은 둘째 아들인데요 그는 평소에 의심이 많고 잔인하며 포악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수완이 좋았는데요 정치적 기회를 잘 잡았고 체력적으로도 매우 강인하며 말타기나 단창과 활을 다루는데도 출중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기원전 39년경에 로마 원로원의 임명을 통해서 더 넓은 지역을 관할하는 유대의 왕이 되었는데요 3년이 더 지나서야 예루살렘에서 안티고누스를 몰아내고 안티고누스파 바리새인들을 축출한 뒤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지위를 확립하였습니다. 그는 로마의 통치자들이 바뀔 때마다 외교술을 잘 활용해서 자신의 정권을 잘 유지하였는데요 그의 지지 세력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에서 카시우스(카이사르를 암살한 인물)로 다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서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로 지지를 바꾸면서 자신의 입지를 다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제 헤로데(헤롯)에 대한 유물들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보이는 비문은 그리스어로 ‘외국인은 출입할 수 없다(No foreigner shall enter…)’는 경고 문구가 써있는 비문입니다. 그리고 그 전문에는 ‘어떠한 외국인도 성소 주변의 앞마당과 난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잡히는 자는 그의 죽음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표시는 성전 주변의 칸막이에 세워진 유사한 많은 표시들 가운데 하나로서 모든 사람에게 허용된 구역과 유대인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성소 구역 사이를 나누었습니다. 이 비문은 제2성전 구역에 남아 있던 몇 안 되는 유물 중 하나인데요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 경고 석판은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져 있었고, 일부는 그리스어로, 다른 일부는 라틴어로 정결한 법을 선포하여 어떤 외국인도 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보이는 비문은 테오도토스 비문(Teodotos Inscription)이라 알려진 고대 예루살렘에 세워진 회당의 창립 비문입니다. 이 비문은 기원 1세기 당시에 헤로디아 신전 옆에 회당이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비문입니다. 이 비문에 따르는 회당의 위치는 성전산 남쪽에 다윗의 도시 쪽에 있었는데요 1913-1914년에 레이몬드 웨일(Raymond Weill)이라는 프랑스 고고학자에 의해 이 근처에서 4개의 암석으로 된 방이 발견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왕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다가 수조에서 테오도토스 비문과 조각된 돌, 기름 램프 등이 함께 의식용 욕조인 미크바도 발견되어 발견되면서 회당 유적지로 추정하게 되었으며 기원 70년 이전에 사용되었던 유대인들의 회당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이 테오도토스 회당의 위치는 ‘이스라엘 박물관 - 예루살렘 모형 편 2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물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발견된 로마식 목욕탕 유적지입니다. 1세기에도 유대속주에서도 부자들은 개인 목욕탕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람들을 위한 대중목욕탕도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헤로데(헤롯) 왕 역시 궁전마다 최신식 목욕탕을 갖추고 있었으며 예루살렘, 아스칼론, 나사렛 등에서도 발견되었습니다. 헤로데(헤롯)는 궁전들에 뜨겁거나 따뜻한 욕실들과 바닥 난방 시설을 갖춘 로마식 목욕탕을 들여왔는데요 이러한 목욕탕은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행하던 종교적 정결의식을 치르는 미크바와는 다른 공공시설에 가까운 건축물입니다.

헤로데(헤롯) 왕은 대대적인 건축 공사를 추진해서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기도 했는데요 신전과 원형 경기장, 수도교, 호화로운 목욕탕이 있는 궁전 요새 등을 건설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건축물이 두드러지게 보일 만한 적합한 장소를 선정하고 주변의 자연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건물을 지었는데요 로마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크기의 항구 도시인 카이사레아를 건설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로마의 기술자들을 불러들여서 지금의 바니아스라는 작은 마을이면서 고대에 카이사레아 빌립보(Caesarea Philippi)라 불렸던 이 장소에 흰색 대리석 신전을 지어서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치기도 했습니다. 이 도시는 카이사레아 빌립보라 불리기 전후에는 파네아스라 불렸는데요 다산의 신인 판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고대 도시의 이름인 파네아스의 아랍어식 표현 바니아스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지금 보이는 유골함은 예수의 재판을 주재한 대제사장 가야바의 유골함입니다. 1990년 11월에 예루살렘의 구시가지에서 남쪽으로 약 1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공원과 도로에서 작업을 하던 사람들로 인해 발견되었는데요 트랙터가 우연히 고대 동굴 묘지의 천장 부분을 무너뜨리면서 매장지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동굴에서는 12개의 유골함이 발견되었는데 당시까지 발견된 유골함 가운데 최고급으로 만들어진 이 유골함은 화려한 문양이 조각되어 있었고 옆에는 예호세프 바르 카야파(가야바의 아들 요셉)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석회암 암석을 파내서 무덤 안에 조각한 바위 벤치에 시체를 안치하는 관습이 있었는데요 보통은 12개월이 지난 후에 살이 썩고 남은 유골을 모아서 다시 석회암 용기에 담아 납골당에 두었습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관의 내부는 2011년 12월의 모습이라 2013년 2월부터 전시하기 시작한 헤로데 대왕의 석관을 보기는 어려운데요 이 무덤은 중동 지역 고고학 발굴로는 사해 두루마리 이후로 최대 규모의 발굴이었기에 오랜 기간 학자들의 관심을 모은 유물입니다. 베들레헴 유다 광야에 쌓아 올린 인공 요새 및 궁전에서 1972년부터 35년간의 발굴 끝에 발견된 이 헤로데 대왕(헤롯 대왕)의 무덤은 2007년 5월 8일 오전 10시에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 시낫 홀에서 발표했는데요 당시 세계적으로 많은 관심을 끌었던 유물이기도 합니다. 헤로데(헤롯) 왕은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 될 것을 우려해서 2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두 죽이라고 명령한 장본인이기도 했으며 25세에 로마 제국으로부터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되어 약 34년간 유대인 땅을 다스린 왕이기도 합니다. 이 유물은 구글로 검색하는 등 다른 경로로 직접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4부를 통해 다른 유물들도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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