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유대 반란 이후 예루살렘이 멸망한 이후로 약 60년이 지나서 다시 2차 유대 반란이 일어나게 되는데요 그 전쟁을 바르 코크바의 반란(기원 132-135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반란이 벌어지게 된 계기는 로마 황제인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 제국 원정을 나간 상황에서 파르티아 제국령에 상주하던 유대인들이 키토스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 전쟁에서 루스우스 퀴에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에 의해 진압되는데요 그는 반란군들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유대 속주까지 긴장감이 고조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에 반발해 바르 코크바는 유대 지역에 자신들의 국가를 선포하면서 자체 화폐를 발행하고 신전을 재건하려 했는데요 초기에는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2년 반 동안 반란에 성공하는 듯 했으나 결국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다시 반란은 진압되었고 예루살렘의 이름마저 ‘아엘리아 카피톨리아’로 강제 개명되었으며 유대인들 출입까지 금지되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18만 명의 사상자와 985개의 유대 마을이 파괴되었으며 바르 코크바를 비롯한 300명이 처형되었습니다. 이제 그 당시 유물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물은 하드리아누스의 동상인데요 1975년 7월 25일에 벳스안(Beth Shean)에서 남쪽을 약 12km 떨어진 곳에서 금속 탐지기로 고대 동전을 찾던 미국인 관광객에 의해서 우연히 발견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한때 로마 제6군단(Legio VI Ferrata)의 분대에 의해 점령되었던 지역인데요 이 조각상은 놀랍게도 황제 숭배에 사용되었습니다. 이 동상은 아마도 그의 군대를 환영하는 최고 사령관의 모습을 하고 있었거나 패배한 적(조각상 옆에 청년의 머리 조각이 발견되었습니다)을 밟고 있는 정복자의 포즈일 수도 있습니다. 이 동상은 황제의 표준화된 모습과 독특하게 귓불이 접혀있는 모양에서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심장병 증상까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벽장안에 있는 전시물은 기원 90년에 군대를 제대하면서 받은 청동으로 된 시민권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이러한 특권은 보통 25년의 군 복무를 마치고 퇴역하는 비 로마 시민으로 구성된 보조병에게 줬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전과를 올린 군인에게 일찍 수여되기도 했는데요 이러한 로마 시민권은 다양한 방법으로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시민권처럼 외인부대의 선임 군인이 제대하면서 로마인이 되기도 했고 황제가 도시나 지역 전체 혹은 개인에게 그들이 수행한 봉사에 대해 상으로 이러한 특전을 주기도 했으며 일정한 금액을 지불하고 시민권을 사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시민권이 있는 사람은 제국 전체에서 인정을 받으며 명예롭게 여겨지는 특별한 권리나 면제의 특전이 보장되었는데요 예를 들어 자백을 받아낼 목적으로 로마 시민을 고문하거나 채찍질하는 것은 불법이었으며 속주 총독의 판결에 대해 로마 황제에게 상소할 수 있는 권리도 있었고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의 경우 로마 시민은 로마로 보내져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을 권리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시민의 자녀 역시 시민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신고해야 하는데 부모의 이름과 아이의 성별, 이름, 출생일을 함께 등록했고 로마의 자치구와 식민지와 주에 사는 시민을 등록한 인구조사를 통해서 5년마다 갱신하였습니다. 시민권으로서의 특권이 이처럼 엄청났기에 시민권을 위조하는 일은 심각한 범죄 행위로 여겨져서 사형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지금 보이는 비문은 유대속주 예루살렘 지역에서 복무하다 죽은 로마 군인의 장례 비문인데요 이 병사는 제10군단에 복무해 전에 영국과 독일에서 복무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클라우디아라는 해방된 노예와 결혼한 것과 42세의 나이로 사망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로마 제10군단은 로마의 정예 부대이기도 하지만 하드리아누스 황제 당시의 바르 코크바 반란 당시에는 격렬하게 저항하는 유대인 반란군에 의해서 많은 사상자가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물은 철제 투구를 발견하면서 안에서 함께 발견된 사슬 갑옷인데요 기원 2세기 경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로마군은 기원전 1세기 경부터 현재의 이탈리아 북부 지방에 있던 골(Gaul)족과 전투를 치르고 나서 사슬 갑옷을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로마인들은 상대방으로부터 좋은 것은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습관이 있었기에 골 족이 사용하던 사슬 갑옷을 받아들여서 로리카 하마타(Lorica Hamata)라는 형태로 채용하게 되는데요 3세기 말의 군제 개혁이 있기까지 로마군의 표준 갑옷으로 오랜 기간 사용되었습니다.
지금 보이는 로마 병사의 투구는 갈레아(Galea)라고 불리는 투구입니다. 이 투구는 여러 유형으로 발전하게 되는데요 중장보병을 위한 4가지 유형의 투구와 이후 30여가지 다양한 유형의 투구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지금 보시는 투구는 로마 군인 하면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유형의 투구인 제국 투구(Imperial Gallic helmet)입니다. 초기 로마 군인의 투구는 얼굴까지 보호하는 형태가 아닌 바가지 모양으로 머리만 보호하는 형태였는데 직업 군인이 등장하면서 제국 투구로 대체되었습니다. 이 투구는 목덜미 뒤로 경사져 있는 목 보호대가 있고 귀 윗부분으로 귀 보호대와 황동 장식되어 있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이후에 전형적인 1세기 중반의 군단 투구인 G형과 더 경사진 목보호대의 H형, 철 대신 구리 합금으로 만들어진 I형으로 나뉘게 됩니다. 그 밖에도 파생돼 Italic D, E, G, H 유형도 있습니다. 지금 보이는 투구는 G형으로 분류되는 투구인데요 바르 코크바 반란 당시 분실되었던 로마군 투구인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장교들은 투구에 일반적으로 빨간색으로 된 깃털이나 말털로 만든 볏이 있었는데요 기병대, 포병, 의무병 이렇게 3대 중보병 병과가 통합된 군단병(레기오나리이:Legioarii)은 볏이 세로로 되어 있었고 80여 명으로 구성된 부대를 지휘하는 백인대장(센추리언:Centurion)은 볏이 가로로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물은 로마군이 사용했던 화살촉과 창촉입니다. 로마군은 궁병을 운영했던 전통이 없었지만 활을 잘 다루는 제국의 동방 초원지대를 영향권에 두면서 이 지역으로부터 궁병을 징집해서 활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은 중보병의 방어와 함께 아군의 머리 위로 화살을 날려서 접전이 벌어지기 전에 적진을 약화시키는 전술을 주로 사용했는데요 활은 장거리 사격이 가능한 복합궁을 사용했고 갑옷 관통용 활과 직접 공격용, 불화살 등 상황에 따라 다른 화살을 사용하였습니다. 로마 궁병은 사슬이나 비늘 갑옷을 입고 철 혹은 청동 투구를 썼으며 왼팔은 작은 보호대로 방어해서 방어력을 강화하였습니다. 또한 방어용 글라디우스를 보유해 근접전도 가능했는데요 이러한 궁병은 대부분 시리아에서 각출하였고 제국 전역의 전투에 참가하였습니다. 또한 이러한 궁병 부대는 제국 전역에서 전투에 참가했고 다른 보조병들과는 달리 특별한 기술을 요했기에 일부 지역 외에서는 선발하지 않았으며 기동성이 높은 적들이 출몰하는 북아프라카나 도나우강 남쪽 국경지대까지도 보내졌습니다.
이어지는 2부에서 로마인들의 유물들을 더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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