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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보/- 장소

방구석 투어 / 이스라엘 박물관 - 이스라엘과 성경편 6부

by 톡톡오늘 2022. 4. 7.

팔레스타인 지역은 서구 열강들의 고고학자들의 성지와 같은 장소인데요 아무래도 당시 유럽의 기독교적인 배경과 교회의 지원이 있었기에 편향된 분위기로 발굴이 진행되었던 것 같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통치에서 영국의 통치로 바뀌면서는 좀 더 고고학적 본질로 돌아와서 종교적인 것보다는 순수하고 역사적이면서 과학적인 성격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로는 이러한 고고학 기관이 예루살렘에 집중되었는데요 1913-14년에는 고대 유물 회수 협회가 설립되어고 1920년부터는 유대인 팔레스타인 탐서 협회로 이름이 변경되었으며 이후에는 이스라엘 탐사 협회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고고학 학교가 1921년부터 운영되기 시작했고 예루살렘에 1926년에 히브리 대학교 고고학 연구소가 설립되었으며 1934년부터는 고고학과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1948년부터 이스라엘 국가가 설립된 이후부터는 해외에 반출된 수많은 유물들이 다시 이스라엘로 반환되기 시작했고 1990년부터는 이스라엘 유물 관리국에서 국가적으로으로 유물에 대한 책임을 지면서 발굴하고 보존 및 관리하는 정부 기관이 됩니다. 이 기관에서 관리하는 유물들이 상당수 이스라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요 이제 다시 유물들을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멀리서 보이는 이 전시물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은으로 만든 부적과 같은 것인데요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가장 오래된 성서 사본이 고대 히브리 문자로 새겨져 있습니다. 이 부적은 사해 두루마리보다 약 500년이나 더 오래된 것인데요 기원전 7세기 말이나 6세기 초에 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예루살렘의 한 동굴로 된 매장지에서 작은 두루마리처럼 말려서 발견되었습니다. 머리카락 굵기보다도 얇은 날카롭고 가느다란 첨필로 새겨져 있어서 처음 발견 당시에는 글자를 해독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이후 아랫부분에 새겨진 글자를 해독할 수 있었는데요 민수기 6:24-26의 내용이라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유대 지역에서는 이 글을 ‘제사장의 축복’(Prestly Benediction)이라 불렀는데요 고대에 자주 인용하던 문구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물은 기원전 7-6세기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예루살렘에서 발굴된 유대인 매장 동굴을 재현해 놓은 곳입니다. 이러한 매장지는 여러 세대에 걸쳐 사용되었던 암석을 깍아서 만든 동굴로 가족 매장지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들은 시체를 무덤 왼편에 보이는 것처럼 벽면을 파서 만든 선반이 있는 장소에 안치한 뒤에 살이 부패한 뒤에는 뼈와 다른 장례품과 함께 바닥에 파낸 다른 구덩이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기존 시체를 안치했던 장소는 다른 새로운 시신을 놓을 공간으로 다시 사용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시체를 놓고 경배하는 일을 행하거나 용인하지 않았으며 매우 단순한 것이 특징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무덤 입구에는 들짐승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큰 돌로 막거나 문처럼 여닫게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문 앞에 두는 둥근돌의 경우 무게가 무려 1톤 이상 나가기도 하였습니다.

이 조각된 석판은 아람(Aram) 왕국의 수도인 그술(Geshur)의 성문 근처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황소의 머리에 칼을 차고 있는 이 신은 비를 관장하는 폭풍의 신인 하닷(Hadad)이거나 강의 팽창을 관할하는 달의 신이거나 혹은 두 신을 융합한 모습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하닷은 고대 시리아의 주신이기도 하며 시리아의 신인 림몬과도 동일한 신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 왕국은 요르단 강 동쪽에 잇던 작은 왕국이었으며 갈릴리 바다 동쪽까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지금 보이는 고대 점토판은 2,700년 전의 것으로 이스라엘의 벤 구리온 공항 근처의 텔하디드(Tel Hadid) 지역의 고고학 발굴 조사를 통해서 출토된 것입니다. 텔하디드는 고대 이스라엘의 중앙에 위치해 있으며 북쪽 이스라엘 왕국에 인접한 장소로 성서에서 알려주는 하딧(Hadid)이라는 도시와 동일한 장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 점토판에 언급된 글과 이름은 전형적으로 알려진 히브리식 이름 즉 이스라엘 사람의 이름이 아니었는데요 메소포타미아 출신의 외국인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이 점토판이 기록될 당시에는 므낫세나 히스기야 왕이 남쪽 유다 왕국을 다스리던 시기였는데요 비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 북쪽 지역에 퍼져서 살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증거와 같이 북쪽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된 이후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주되어 거의 남아있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물은 아시리아 군대의 무시무시한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는데요 5부에서 봤던 이스라엘 혹은 유대인 군대의 무기와 비교해 봤을 때 매우 강력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아시리아군과 유대 왕국의 도시인 라기스에서 있었던 공성전에 사용된 실제 무기들 혹은 복제품들이 전시된 것으로 보이는데요 사슬이 달린 갈고리는 공성전에서 성벽에 걸었을 고리로 보입니다. 이러한 갈고리를 던져서 성벽 위에 있는 군인을 직접 당겨서 밖으로 떨구거나 성벽에 걸린 고리를 타고 직접 넘어가 전투를 수행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오른쪽 돌은 공성에 사용된 돌인데요 이러한 돌을 날리기 위한 전문 돌팔매 부대가 양성되었습니다. 이러한 돌이 수비하는 측에 떨어지면 심리적으로도 상당한 공포심을 가져다줬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래 보이는 청동으로 된 창 끝은 이스라엘 측의 창보다 훨씬 치명적인 모습으로 보입니다.

지금 보이는 전시물은 이스라엘 박물관을 대표하는 전시물 가운데 하나인 예루살렘 프리즘(Jerusalem Prism)입니다. 이 프리즘은 아시리아의 왕인 센나케리브(산헤립)의 연대기가 적혀 있는 비석인데요 같은 내용이 적혀 있는 이 프리즘이 발굴되어 영국 박물관(대영 박물관), 시카고 오리엘탈 박물관 그리고 바로 이 이스라엘 박물관에 하나씩 보관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이 프리즘은 1970년에 소더비 경매에서 이스라엘 박물관에 인수되어 1990년부터 전시되고 있습니다. 이 연대기는 유다 왕국의 히스기야 왕이 통치하던 기간 동안 센나케리브(산헤립)가 예루살렘을 포위한 것을 묘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러한 점은 성서 이사야 36장과 37장에도 기록되어 있는데요 센나케리브(산헤립)가 히스기야로부터 받았다고 주장하는 금액과 히스기야가 보낸 것이 기록된 성서의 내용이 다른 관점으로 기록된 것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내용들보다 더 주목받는 내용은 예루살렘을 점령했다는 주장이 없기에 실제 막강한 아시리아의 전투력을 가지고도 어떠한 이유로인가 실제 점령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어서 마지막 7부에서 이스라엘과 성경편의 나머지 유물을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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