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역사에서 스키타이 민족을 빼놓고 이야기하기 어려운데요 민족적인 특성으로는 다르다 해도 문화적으로 그리스의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19세기에는 유럽에서 민족주의 열풍이 불면서 스키타이족을 잔인한 야만인에서 아리아인(게르만족, 켈트족, 그리스인 등의 인도 유럽 계통)의 거칠고 자유로운 민주적인 조상으로 변형되었다고 주장하였는데요 영국에서도 일부 학자들을 중심으로 스키타이족들이 자신들의 민족인 앵글로 색슨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한국도 2009년 역사스페셜 ‘신라 왕족은 정말 흉노의 후예인가?’ 편에서 신라인과 흉노족의 DNA 분석을 의뢰했는데요 의외로 흉노보다는 스키타이와 거의 일치하게 나오게 되는데요 너무나 의외의 결과라 여러 차례 반복해서 재검했지만 모두 같은 유전자로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실제 스키타이 유물과 신라의 유물은 유사한데요 둘 다 금을 숭상하는 문화가 같고 무덤 양식, 금관이나 보검 등 문화적으로 유사한 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른 설로 고구려나 고조선의 조상 혹은 영향을 준 민족으로 보기도 하는데요 흥미로운 점이네요. 스키타이와 관련된 유물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번 마지막으로 봤던 배우의 조각상 맞은편 문을 통해서 복도를 따라 길게 되어 있는 북쪽관(North Hall)으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방에 들어가자 마자 오른쪽에 다시 작은 방이 있는데요 잠시 들어가 보시죠.
방에 들어가자마자 지금 보이는 유물은 스키타이인의 칼 손잡이와 칼집입니다. 스키타이를 그리스 역사의 일부로 여기는 경우도 많은데요 마치 한국 고구려 민족 구성에 거란, 선비, 말갈, 돌궐 족이 같이 포함되어 있는 것과 비슷하게 볼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스키타이 족도 유목 민족인데요 그리스어로 궁수(Skuthes)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에 대해 조사한 결과로 금발에 튀어나온 광대뼈와 장신에 큰 체구를 지니고 털이 많은 민족인 것으로 추정되며 마케도니아 인접에서 그리스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고 황금을 숭상하는 문화로 지금 보는 칼과 같이 황금으로 된 유물이 많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매우 호전적인 민족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포로로 잡은 사람의 두개골로 잔을 만들어 사용하고, 그 머리 가죽으로는 겉옷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최근에는 놀랍게도 스키타이인과 신라인의 DNA가 비슷하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리스인들은 가장 미개한 사람들을 가리켜서 스키타이인이라고 불렀다고 하니 당대 그들을 어떻게 여겼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안쪽에는 스키타이인들이 사용했을 청동 거울이 보이는데요 이들은 거울에 마력이 있다고 믿었기에 손잡이나 뒷면에 사슴, 염소 같은 동물을 장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주조기법에 따라 테두리가 있는 거울과 없는 것 그리고 손잡이의 유무와 달린 위치에 따라 분류되었는데요 그리스의 거울과 모양이 유사하게 생겼습니다. 그리고 테두리가 두꺼운 이러한 양식의 거울은 중앙아시아에서도 사용되는 양식인데요 스키타이 왕족이나 귀족들은 이러한 공예품을 그리스 출신 장인에게 주문 제작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스키타이인들은 기원전 2세기까지 러시아 남쪽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인근에서 존속하다가 세력이 서서히 약해져서 다른 민족 집단에 서서히 흡수되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방 안쪽에 다른 유물들도 추가로 보고 싶었지만 구글 스트릿뷰의 접근상 한계로 크게 이렇게 두 가지만 소개하고 나와야겠네요. 이제 방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있는 그리스 무덤들 부조들 사이를 지나 도자기들이 보이는 벽장까지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른쪽에 있는 벽장 오른편에 다음과 같은 부조가 보이는데요 기원전 5세기경에 보스포루스 해협 인근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조각입니다. 이 조각에는 마주 앉은 두 소녀가 서로 막대기를 잡고 있느데요 어떤 놀이를 하고 있거나 점을 치고 있는 모습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고대에는 여자들이 종교적인 휴일에 사람들 앞에 나왔는데요 많은 종파의 여성과 소녀들이 여사제로 혹은 성직자로 활동하였습니다. 특히 여러 여신 숭배나 아도니스 축제와 같은 일부 축제는 여성만이 참석해서 거행하였는데요 시신을 준비하는 일부터 무덤을 방문하는 것까지 죽은 자들에 대한 숭배 행위는 여성들이 해야만 하였습니다. 고대 여자들은 방적, 직조, 가사, 자녀 양육, 농산물 가공, 결혼, 출산 등 해야 할 일이 많았는데요 오히려 남자들에 비해 상당히 많은 책임을 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보이는 도자기 밑면에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데요 고대 그리스의 다양한 문화와 관습에 대해 소개하는 그림들이 있습니다. 이 도자기에는 안쪽에 도리스식 그림(Douris Painted)이라고 적혀 있고 그리스인들의 교육과 관련된 그림들이 있네요. 영어 단어 학교(School) 역시 그리스어(Schol)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이 그림의 그리스 소년들의 교육은 오직 부유한 자유민 남자만을 위한 것이었는데요 교육의 최종 목표는 먹고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모든 학생에게는 한 명의 교사가 있었고 이 그림에는 실제 교육 과정에서 일어날법한 상황이 그려져 있습니다. 함께 악기를 다루고 두루마리의 글을 암송하고 있는 장면도 있습니다. 그리고 파이다고고스라 불리는 신임받는 종은 아이를 데리고 학교를 오가는 일을 하기도 하였는데 여섯 살부터 교육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교육은 도시들마다 훌륭한 시민상이 달랐기에 스파르타는 교육의 대부분이 신체 단련과 관련이 있어서 어린 소년들이 일곱 살이 되면 강제로 부모 곁을 떠나서 병영에 배치되어 30세까지 있었습니다.
중앙 복도를 따라 벽장 뒤쪽 왼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조각상이 보이는데요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정치가이자 웅변가, 군인이었던 페리클레스(Pericles)의 두상입니다. 그는 기원전 490년에서 429년 사이의 아테네 황금기에 살았던 인물인데요 이 시기를 페리클레스 시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의 생애는 고대 페르시아에 대한 그리스의 승리로부터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될 때까지의 기간인데요 뛰어난 웅변과 정치력 덕분에 460년 말부터 아테네의 정치 환경을 형성하는데 많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15년 연속으로 의회에 의해서 장군으로 선출되었는데 이는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실제로 선출된 몇 안 되는 공직 중 하나였습니다. 동시대 역사가인 투키디데스에 의해서 아테네의 첫 번째 시민이라는 찬사를 받았는데요 그는 예술과 문학을 증진시켰고 아테네를 그리스 세계의 교육과 문화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파르테논 신전을 포함해서 아크로폴리스에 남아 있는 대부분의 건축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는데요 비평가들이 그를 포퓰리스트라고 부를 정도로 아테네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군사의 지위를 보여주는 머리에 코린트식 투구를 쓰고 있는데요 신원 확인을 가능하게 하는 개인적인 특성은 없지만 고대 아테네 시민의 이미지와 비슷하며 감정의 흔적을 드러내지 않는 모습이 그의 전기에서 말하는 자신이 나타내는 자재력을 이상적으로 잘 반영하였습니다. 이 머리는 수많은 로마 시대 사본 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
페리클레스 맞은편에는 고대 아테네 지형을 들여다볼 수 있는 아크로폴리스(The Acropolis)라는 모형이 나옵니다. 축소된 모형을 보면 고대 도시에 대해 상상해 볼 수 있는데요 아크로폴리스는 말 그대로 높은 도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신전과 동상, 야외 대법관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은 고대 아테네의 신성하게 여겨지는 심장부였습니다. 기원전 448년경부터, 당시 아테네의 정치가인 페리클레스는 기원전 480-479년에 페르시아에 의해 파괴된 신전들을 재건하기 시작했습니다. 페리클레스의 건설 계획은 아테네의 그리스인들이 전쟁을 통해 얻은 전리품 등 여러 공물로 자금 조달을 하였습니다. 중심부는 파르테논 신전으로, 페르시아 침공 직전에 시작된 신전 건축 자리에 지어졌습니다. 기원전 438년에 아크로폴리스로 가는 완전히 새로운 관문(프로필라이아)이 건설되었지만 완공되지는 않았습니다. 모형도에서 앞쪽에 여섯 개의 기둥이 있는 건물과 좌우의 흰 대리석 건물들이 프로필라이아(Propylaia)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아크로폴리스 오른쪽 상단 모서리에는 회의를 열었던 법정 의회인 아레오파고스가 보입니다. 이곳에서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자들이 토론하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가운데 복도를 중심으로 중앙을 구분해 놓은 벽장 너머 왼편으로 돌아서 보면 다음과 같은 유물이 보이는데요 고대에 사용되던 냄비와 손잡이입니다. 이 냄비에는 고대 그리스의 축제가 묘사되어 있는데요 멀리 있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축제를 위해 도살할 양들을 들고 가는 모습이 보이네요. 특히 축제 가운데는 디오니소스를 기리는 축제가 가장 과격하기도 했는데요 고대 그리스에서는 종종 해방자라는 의미의 엘레우테리오스(Eleutherius)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디오니소스 가지고 특징인 축제, 포도주와 같은 것들이 사회에서 소외된 하층민들에게 사회적 제약이 없이 해방감을 주기 때문에 그러한데요 이 신은 이후에 로마 신화의 바쿠스(한국에서 널리 마시는 자양강장제인 그 박카스가 맞습니다)와 동일시되면서 나중에는 과격한 축제 행위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이교 숭배 행위를 금지하면서 이러한 축제 역시 점점 쇠퇴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흥청망청한 파티는 세계 전역에서 즐기는 하나의 요소 이기도한데요 사람들은 이런 해방감을 주는 삶에 대해 동경한다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제 3부에서는 중앙홀에 있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양한 신들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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