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인류는 오랜 세월 동안 수없이 많은 나라들이 흥망성쇄 했는데요 어떤 경우는 학살당하거나 강제 이주되어 말 그대로 나라가 없어지는 일도 있었지만 민족 구성원은 그대로 있지만 국가 지배층만 바뀌는 경우도 있어왔습니다. 이러한 사건을 정권 교체로 볼 것인지 아니면 구가의 멸망으로 볼 것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따라 다른 것 같습니다. 국가가 멸망하는 데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크게는 6-7가지 정도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1. 첫 번째로 외부적인 요인인데 너무나 강한 이웃 국가의 등장으로 무력으로 제압당하면서 없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2. 두 번째로는 내부적인 요인으로 내부적인 반란이나 쿠데타 등이 있습니다. 3. 세 번째로는 경제 문제로 잘못된 경제 정책으로 인해서 국고 고갈과 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으로 인한 파산이 있으며 4. 네 번째로 한정된 자원의 고갈 문제도 있습니다. 5. 다섯 번째로 종교 문제로 인해 멸망하기도 하고 6. 여섯 번째 요인으로 자연적으로 대 재난이 일어나거나 7. 일곱 번째 요인으로 국론 분열로 자멸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로마는 이 경우에 어디에 해당이 될까요? 로마의 멸망 원인은 하나의 원인만 꼽기에는 너무 복합적인 면이 있기에 특정해서 이야기하기 어렵지만 가장 큰 문제로 바로 일곱 번째 요인을 꼽기도 합니다. 로마라는 국가 자체는 내부적으로 끊임없는 분열과 갈등으로 인해 결국 스스로 멸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요인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국가 멸망의 원인은 대부분 일곱 번째 요인인 내부적인 갈등과 국론 분열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이제 로마의 마지막 전성기 시절을 보냈던 몇몇 황제들을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보이는 초상은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Lucius Aurelius Verus)이며 그의 형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공동 황제였습니다. 로마 제국에서 공통 통치자로서 최초이긴 했지만 제국 후기에서는 점점 흔한 일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본가는 에트루리아에서 시작된 오래된 명문가문이었는데요 외가쪽으로도 명문 가문 집안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8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 아일리우스 카이사르가 사망하게 되면서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양아들로 입양되었습니다. 공식 후계자였던 안토니누스의 처조카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뒤늦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후계자로 제왕 수업을 받은 루키우스는 안토니누스 사망 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요청으로 31세에 공동 황제에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루키우스 베루스는 평범한 군주로서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당대 로마인들과는 다르게 큰 키에 금발머리와 파란 눈을 가진 외모를 가지고 있었으며 잘생긴 외모로 인기도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39세의 젊은 나이에 병에 걸려 사망하였습니다.
왼쪽은 파우스티나 더 영거(Faustina the Younger)이며 오른쪽은 그의 남편이자 제16대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의 왕세자 시절의 모습입니다.
파우스티나 더 영거는 그녀의 어머니(Faustina the Elder)의 이름을 따서 파우스티나로 명명되었는데요 그녀의 부모의 막내로서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자녀입니다. 그녀는 145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결혼하였고 안토니누스 사망후에는 황제에 오른 남편에 따라 황후가 되었는데요 파우스티나의 생애에 관한 로마의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지만 남아 있는 일부 자료에서는 그녀에 대해 부정적인 내용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선원이나 검투사 혹은 고위층과의 간음이 있었고 아비디우스 카시우스(Avidius Cassius)의 남편에 대한 반란을 선동한 혐의도 있었는데요 그래도 표면적으로는 남편 아우렐리우스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남편을 따라 군사 작전에 동행했고 로마 병사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는데 아우렐리우스는 그녀에게 캠프의 어머니(Mater Castrorum)라는 칭호까지 주었습니다. 파우스티나의 죽음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지만 할랄라의 군영에서 사망했으며 죽음의 원인은 자연사, 자살, 사고, 카시우스와의 불륜에 따른 보복 암살 등 여러 설이 있습니다. 사망 이후 신격화된 그녀는 여러 동상이 세워지고 그녀의 이름을 딴 도시와 학교, 목욕탕 등을 설립하기도 하였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황제이자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이기도 했는데요 5 현제의 마지막 통치자였으며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마지막 황제이기도 하였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여러 치적이 있었는데요 흥미로운 점들 몇 가지는 중국 한나라와의 접촉 가능성이 있는데요 중국에서는 한나라 시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의 로마 유리 제품과 로마의 황금 메달 등이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실제 로마 주화가 중국 시안에서 발견되었는데요 해상 무역이 실크로드를 중심으로 한 무역로보다 더 활발했다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또한 당대 그리스도인들과 관련된 문제도 로마 지방 행정에서 처리해야 할 지역 문제로 취급되었는데요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아우렐리우스 통치 기간 동안 크게 증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아우렐리우스가 직접 그리스도인 탄압과 관련된 지시를 내렸거나 장려한 것에 대해서는 불분명해서 역사가들 사이에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요 그가 그리스 종교에 매우 열심이었던 인물이었음을 생각해 볼 때 그리스도교를 탄압했던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지금 보이는 초상은 로마의 제20대 황제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입니다. 그는 디디우스 율리우스 황제를 폐위시키고 살해한 뒤 라이벌인 로마의 장군 페스켄니우스 니게르와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와 싸웠는데요 둘을 순서대로 제압한 뒤에 통치를 강화하였습니다. 여러 군사 활동을 벌였고 자신의 아들을 공동 황제로 세우면서 세베루스 왕조가 시작되었는데요 기원 3세기 로마 제국의 위기가 있기 전의 마지막 로마 제국의 왕조였습니다. 세베루스는 원로원과 관계가 상당히 안 좋았는데요 제국 내에서의 군사 개혁을 통해서 이탈리아에 제국군의 일부를 주둔시킨 최초의 황제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아들들에게 ‘서로 사이좋게 지내고 군인들을 부유하게 해 주고 다른 모든 사람은 무시하라’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을 했다. 원로원도 하고 변호사도 하고 집정과도 하고 대대장도 하고 장군도 하고 황제도 했다. 국가 요직은 모두 거치고 임무도 충실했다고 자부하지만 이제 생각해보니 그 모두가 헛된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세베루스 통치 초기에는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한 탄압이 있었지만 일부는 직접적인 탄압이 아닌 지역적인 탄압의 결과였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지금 보이는 초상은 제37대 황제인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Lucius Domitius Aurelianus)의 초상입니다. 그는 일리리아 농민 출신 혹은 로마 정착민 출신으로 추정되는데요 장군으로서 여러 전공을 쌓았고 국가적으로 매우 혼란한 상황에서 로마군의 추대로 황제가 되었습니다. 역대 로마 황제 가운데 가장 군사적인 재능이 뛰어났던 인물인데요 3세기 로마 제국의 최악의 위기를 군사적 재능과 카리스마로 모든 전쟁을 거의 다 이긴 인물입니다. 반달족, 알레마니족을 격퇴하고 로마 주변에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을 세웠으며 팔미라 제국과 갈리아 제국을 정복했습니다. 그리고 전제군주정을 손을 봐서 중앙집권을 더 강화시켰는데요 솔 인빅투스(Sol Invictus)라는 무적의 태양신 숭배 의식을 대대적으로 전개해서 로마 제국을 통합하려 하였습니다. 그는 12월 25일을 솔 인빅투스 기념일로 정하고 로마 국교를 완성시키려 했는데요 암살되면서 무산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로마 군인 황제 시절에 가장 유능하다고 평가받는 황제이기도 했지만 매사에 엄격한 행정 처리로 인해 비서 중 한 명인 에로스에 의해서 암살되었습니다.
지금 보이는 부조는 로마의 제13대 황제인 트라야누스(Traianus) 집권 당시의 군인을 묘사한 부조인데요 트라야누스는 최초의 속주 출신의 로마 황제로서 로마의 최전성기를 이룩한 황제이기도 합니다. 그는 즉위한 이후 가장 먼저 도미티아누스가 중단한 다키아 원정을 다시 시작했는데요 다키아 원정을 통해서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로마 제국의 중요한 북방 경계선인 도나우 강 하류의 안전을 도모하려 하였습니다. 그는 다키아 군의 주 무기는 투척 도끼로 로마군의 피해가 가중되었음을 인지하고 정강이 받이와 오른팔을 보호하는 찰갑, 안면 가리개 등을 도입해서 중무장한 군대로 다키아를 정복해 나갔는데요 2차례 원정을 통해 다키아 지역을 초토화시키고 다키아의 광산과 전리품들을 통해서 로마의 도시들을 개발할 자금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트라얀누스는 그리스도인들과도 관련이 있는데요 조카인 소 플리니우스와 서신을 주고받은 서한집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의 행방을 굳이 밝히지도 캐지도 말라고 명령을 내리면서 법을 따르면서도, 마구잡이식의 처벌은 안된다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재위 기간에도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처벌을 받았는데 로마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행태가 사회의 불안요소로 보였기에 그러합니다.
지금 보이는 초상은 아우구스투스 아내인 리비아 드루실라(Livia Drusilla)입니다. 그녀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세 번째 부인이었는데요 아우구스타(Augusta)라는 칭호를 받은 최초의 로마 여성이었습니다. 결혼 생활은 아우구스투스가 죽을 때까지 52년간이나 지속되었는데요 당시에는 이러한 결혼생활이 오히려 이례적이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매우 모범적인 어머니로 평판을 중요하게 여겼고 남편과도 정치적인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적, 지적 능력이 비범하였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아우구스투스가 감정적으로 격렬하게 반응하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냉정함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장남인 티베리우스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티베리우스의 결혼 생활이 리비아의 입김으로 파탄났고 황제가 된 뒤에도 간섭이 심해졌기에 결국 티베리우스는 리비아의 특권과 권한을 모두 박탈하게 되었는데요 리비아가 사망한 후에 티베리우스는 그녀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유언장 집행도 무시했었습니다. 이후 증손자인 칼리굴라에 의해서 유언이 집행되고 명예도 회복되는데요 클라우디우스에 가서야 완전히 복권되고 신격화되어 많은 초상들이 세워지기도 하였습니다.
8부에서부터는 다른 박물관으로 이동해서 유물들을 계속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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