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전쟁이든지 전쟁의 승패는 보급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2차 세계 대전에서는 북아프리카에서 활약했던 롬멜이나 러시아 원정을 떠났던 나폴레옹 역시 뛰어난 전술적 우위가 있었더라도 보급이 안되었기에 결국 패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면 1만 명의 군대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매일마다 먹는 식량과 식수, 말먹이, 무기 등 보급품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2-3만 명의 보급대가 함께 붙어야 하는데요 다니는 지역마다 약탈을 한다 하더라도 부족분을 모두 채운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요 아시리아 군대는 이러한 병참 물류 분야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오랜 기간 원정을 한다 하더라도 군대를 먹일 수 있도록 가는 길마다 식당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왕실의 가족과 하인, 고문, 유흥 담당까지 포함해서 함께 원정을 다녔기에 오랜 기간 원정을 떠나더라도 지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고대 아시리아 군대는 기병을 최초로 사용한 군대 중 하나였고 무거운 병거가 강을 건널 때는 부풀린 양가죽을 사용해서 뗏목을 떠 있게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고대 몽골제국에서처럼 파발을 사용해서 제국 전체에 신속하게 소식을 전달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들의 군대가 강력했다는 점은 장점이었지만 반대로 그들이 했던 잔인한 살상과 같은 심리전은 상대에게 공포감도 주었지만 반발심도 주었기 때문에 결국 제국이 멸망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제 아시리아의 유물을 계속 살펴보도록 하시죠.
방 오른쪽 벽장 안에는 아시리아인들이 사용하던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는데요 여기 보이는 활은 궁수의 능력에 따라 사정거리가 250-650미터가량 되었습니다. 이들은 전투에서 궁수들을 잘 활용하였고 전투에서 더 많은 화살을 사용하기 위해 화살을 제조하는 인원도 함께 이동하였습니다. 궁수들은 아슈르나시르팔 시대부터 방패를 든 사람들과 함께 동행해서 전투하였으며 적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역할과 적의 투석으로부터 궁수들을 보호하는 가운데 뒤에서 궁수들은 공격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궁수들은 일반적으로 외국인으로 많이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활 왼쪽에 보면 아시리아와 인접한 우라르투 왕국 왕국의 갑옷도 보이네요. 이들은 아시리아에 종속된 국가였는데요 아시리아의 왕 아슈르바니팔을 그의 ‘아버지’로 언급했던 것으로 보아 그러합니다. 이러한 상감 갑옷과 찰갑(미늘) 갑옷을 입기도 했는데요 군사적으로 잘 무장된 상비군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다시 방에서 나와서 오른쪽 첫번째 벽장 옆면에 있는 부조를 보겠습니다. 이 부조의 인물은 아시리아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의 아내인 리발리샤라트(Libbali-Sharrat)입니다. 여자로서 단독의 부조로 만들어지는 희귀한 특권을 누렸던 이 여왕은 성벽을 본뜬 왕관을 쓰고 있습니다. 리발리샤라트는 오른손을 들고 경례를 하면서 앉아 있는 모습으로 왕좌의 등받이 부분만 볼 수가 있습니다. 리발리샤라트의 이름은 본명이 아닌 이후에 지어진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데요 그의 이름에 여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며 아슈르바니팔과 결혼했거나 에살핫돈에 의해서 왕세자와 상속자로 지정되었을 때 지어진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리발리샤랴트라는 이름은 ‘도시 내부의 여왕’이라는 의미를 가라키며 도시 내부는 이슈타르 여신에 대한 용어일 수도 있습니다. 리발리샤타트는 왕실 생활을 하면서 읽고 쓰는 법을 배우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 아슈르바니팔이 니네베에 지은 거대한 도서관을 위해 자료를 모은 것으로도 알려졌습니다. 아슈르바니팔은 성서에도 나오는 인물인데요 아스납발이라는 이름으로 에스라 4:10에 나옵니다. 실제로 아슈르바니팔의 각주 비문에는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친 사람들로 약 20명의 왕을 열거하는 가운데 유다의 므낫세 왕의 이름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제 계속 다음 벽장 사이에 있는 부조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벽장 사이의 오른쪽에는 다음과 같은 부조가 보이는데요 아슈르바니팔(Assurbanipal) 궁전 북쪽에 있던 부조이며 아시리아 군대 캠프에 대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글 스트릿뷰로는 희미하게 보이기에 자세하게 설명을 하자면 엘람(Elamite)의 도시 하마누(Hamanu)를 포위 공격하는 동안 도성 기슭에 있는 캠프인데요 캠프 안에는 거실과 주방을 비롯해서 마차가 끄는 이동 공간과 다양한 가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캠프에는 음료수를 들고 있는 하인이 돌아온 장교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아시리아인들은 이동형 군대 캠프를 잘 만들기도 했는데요 캠프 안에는 큰 도로를 만들고 정비를 잘해서 하나의 작은 도시를 이동하며 만드는 것과 같이 움직였습니다. 이들은 구리나 청동, 철로 된 금속 타이어를 최초로 제조하기도 했는데요 내구성이 좋았기에 장거리로 거친 장소를 이동하는데 용이하였습니다.
이 방을 돌다보면 니네베에 있던 다음과 같은 부조가 보이는데요 장교들이 행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군대를 개혁하기 전까지의 초창기 아시리아 군대는 왕과 다른 귀족과 관리를 보호하는 소수의 경호원이었고 대부분의 군인들은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군사 행동이 필요할 때는 많은 병력을 동원하기에 좋았지만 결국 약점이 드러났습니다. 전투에서 주요 병사들이 전사하면 병사들은 다시 자신들의 생업을 위해 탈영하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 상비군을 도입하게 되었는데요 외국 군인과 아시리아 군과의 통합을 위해서 같은 장비와 제복을 입게 하였고 기병과 병거를 계속 발전시키게 되었습니다.
라마수가 있는 다음 방 출입구 왼쪽을 보면 센나케리브(산헤립)의 궁전에서 발견된 아시리아 궁수와 군인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아시리아 군대는 촘촘하게 잘 조직되어 있었고 병거와 기병, 보병, 공병의 4가지 다른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기원전 8세기부터는 외국인으로 구성된 전문 분야의 부대를 구성하기도 했는데요 오른쪽에 있는 두 개의 투구를 보면 끝에 구부러진 장식이 이 병사들이 용병임을 식별하게 합니다. 이러한 보병에는 아람인과 심지어 그리스인도 용병으로 포함시켰는데요 주요 군단인 기병대와 병거는 계속 아시리아인들로 구성하였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외국인이 특수병과 군대에 편입되지 않았던 건 아닌데요 사르곤 2세는 자신의 군대에 60개의 이스라엘 전차병이 운영되고 있다고 기록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외국 군대는 속국으로 있는 지역에 조공으로 제공을 받거나 아시리아 왕의 필요에 의해서 요구함으로 공급받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다음 11번 방으로 넘어가보겠습니다. 11번 방으로 넘어가면 날개 달린 요정 부조와 라마수(날개 달린 인면 황소) 석상이 있습니다. 날개 달린 요정 부조는 다음에도 나오기에 라마수에 대해서만 살펴보겠습니다. 라마수(Lamassu)는 아시리아의 보호 신으로 인간의 머리와 황소 혹은 사자의 몸과 새의 날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세두(Shedu)라고도 불리는데요 궁궐 입구에 이처럼 라마수 한 쌍을 세워 두었습니다. 최초의 라마수는 티글라트필레세르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아시리아의 권력의 상징으로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거대한 라마수 입구의 뒤에는 종종 꿈틀거리는 사자를 한 팔로 움켜잡고 있는 아시리아의 영웅이 있는데 이 역시 거대하게 세워 두었습니다. 두르샤루킨(Dur-Sharrukin)에 있는 사르곤 2세(Sargon II)의 궁전에서는 적어도 7개의 라마수와 2명의 영웅으로 구성된 왕좌의 방으로 구성되어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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