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이스라엘군은 1948년에 창설되었으며 6차례의 주요 전쟁에서 엄청난 실전 경험과 효율적인 작전으로 명성이 높은 군대로 손꼽히는 군대입니다. 특히 시가전에서는 매우 전문화된 군대이데요 적은 인구로 인해서 여자들도 징병제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전체 이스라엘군은 현재 17만 명에 45만의 예비역을 보유하고 있는데요 현역병의 비율은 인구 대비로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나라이기도합니다. 이스라엘은 아랍인들도 입대를 허용하지만 까다로운 입대조건과 차별대우로 군에서 진급하기도 어렵습니다. 이스라엘은 핵무기를 보유한 군대로도 유명한데요 약 80 여기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역병이 적다 보니 예비군 역시 훈련이 잘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아랍계의 적대 행위가 있어왔는데요 팔레스타인도 자신들의 거주지에서 쫓겨나 살게 된 것에 대한 반감과 아랍계 사람들의 공동체 의식으로 인해서 대부분의 중동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눈의 가시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분쟁 상황은 종교와 민족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없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제 계속 예루살렘 모형을 둘러보시죠.
지금 보이는 예루살렘의 남서쪽 방향으로 탑이 보이는데요 이 탑은 고대 유대인들의 전승에 따라 복원한 다윗의 무덤입니다. 다윗이 실제로 묻힌 장소는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예루살렘의 도성 지역에 묻혀 있다고 나와 있는데요 요세푸스는 헤로데 왕이 다윗의 무덤을 도굴하려 했지만 내실까지는 도굴하지는 못했다고 전하며 이 무덤은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 통치에 반대하는 바 코흐바 반란 당시 파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무덤에서 성벽 방향으로 있는 직사각형의 집이 대제사장 가야바(Caiaphas)의 집으로 보입니다. 그는 전직 대제사장 안나스의 사위였으며 폰티우스 필라투스(빌라도)의 전임자인 발레리우스 그라투스에 의해서 기원 18년경부터 대제사장직에 임명되어 일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의 죽음 당시까지 대제사장으로 직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요 외교에 능하고 로마의 통치에 잘 협력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예수의 죽음 뒤에도 그리스도교의 주요 탄압자로서 역할을 하였는데요 기원 36년경에 로마에 의해서 직위가 해임되었습니다.
지금 보이는 건물은 헤로데의 궁전인데요 기원전 37-4년까지 건설되었던 건물입니다. 헤로데 시절에 예루살렘의 성전 다음으로 중요한 건물이었고 예루사렘의 북서쪽 성벽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헤로데는 이 궁전에만 있지는 않았는데요 다른 궁전 요새들 가운데 마사다와 헤로디움, 카이사레아 마리티아도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곳들에 다니면서 있었습니다. 이 궁전은 300m X 55m 대지의 높은 옹벽 지대 위에 세워졌는데요 2개의 주요 건물로 구성되어서 각각 연회장과 목욕탕, 수백 명의 손님을 위한 숙박 시설 등을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두 동은 아그리파(Agrippa)와 카이사르(Caesar)의 이름을 다서 지어졌습니다. 이 궁전은 헤로데가 죽은 후에 주요 유대 축제 기간 동안 예루살렘에 도착한 로마 총독들의 공식 거주지였습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를 재판하던 장소도 이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헤로데 궁전의 북쪽에는 거대한 세 개의 망대가 있었는데요 파사엘(Phasael) 탑이 가장 컸고 헤로데의 형제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며 44m 높이였으며 히피쿠스(Hippicus) 탑은 헤로데의 친구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며 높이는 40m 높이였습니다. 마리암네(Mariamne) 탑은 22미터 높이로 헤로데가 처형한 하스모네의 아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는데 요세푸스에 의하면 왕은 여자의 이름을 딴 탑이 남자의 이름을 딴 탑보다 장식적으로 더 뛰어나야 한다고 생각해서 더 아름답게 만들어졌습니다.
지금 보이는 세 번째 성벽 북서쪽 모퉁이에서 가장 큰 망대는 프세페누스(Psephenus)의 탑이라 불리는 부분입니다. 이 탑은 헤로데 아그리파 1세(Herod Agripa I)에 의해 기원 41-44년 사이에 건설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 탑의 높이가 35미터였고 아라비아에서 지중해 바다에 이를정도로 보이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탑은 지금의 예루살렘 서안에 위치했을 수 있으며 고고학적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기에 유대인 전승을 포함해 장소를 추정하여 만들어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성벽 중앙이 있는 성문은 물고기 문(Fish Gate)이라 불리는 문입니다. 이 문은 처음에는 히스기야가 성벽 일부를 건축하면서 만들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에 예루살렘을 재건한 느헤미야가 이 문에 대해 언급하게 되는데 예루살렘 북쪽 성벽에 있는 문으로 티로포이온 골짜기 북단에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문은 티레, 갈릴리, 요르단 등에서 온 어부들이 물고기를 팔던 어시장 근처에 있었기에 그러한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보이는 건축물은 알렉산더 얀나이오스(Alexander Jannaeus) 왕의 무덤인데요 기원전 103-76년에 유대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레위인을 조상으로 하는 하스몬 왕국의 왕이었던 요한 히르카노스(John Hyrcanus)의 아들이자 유대를 독립으로 이끈 시몬 마카베오(Simon Hasmonean)의 손자이기도 합니다. 그의 치세 중에 헬레니즘 문화에 빠져들어 바리새파의 비난을 받기도 했고 내전도 심화되었지만 군사적 재능을 발휘해서 내전을 진압하고 반대파와 바리새파의 주요 인물들을 숙청하였습니다. 그는 바리새파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에세네파와도 가까이 지냈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쿰란에서 발견된 사해문서 중에는 얀나이오스를 기리는 기도문도 있었습니다. 그는 내전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서 영토 확장을 꾀하였고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전쟁을 벌였지만 기원전 76년에 49세의 나이로 전투 중에 전사하였습니다. 그는 유언에서 자신의 시체를 처분할 권한을 바리새파에게 넘겼는데요 이처럼 바리새파와의 관계를 개선함으로 그의 사후에 통치하는 아내인 살로메 알렌산드라가 안정된 통치를 펼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보이는 사각형의 둘로 된 건축물은 베데스다(벳사다) 못인데요 1888년에 성전 유적지 바로 북쪽에서 이루어진 발굴 작업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는데요 이 못은 바위로 된 칸막이로 나뉘어 있고 전체 면적은 46m X 92m 가량 됩니다. 주랑들이 존재했던 흔적과 물을 움직이는 천사를 묘사하는 희미한 프레스코도 발견되었는데요 이 그림은 이후에 부가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밝혀진 바에 의하면, 베데스다 못은 유대인들의 정결 의식을 위해 사용되던 장소인데요 목욕을 하던 못의 물이 북쪽에 붙어 있던 다른 못에서 유입이 되었는데 사실 두 못이 둑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둑의 수문을 열면 북쪽 못의 물이 수로를 거쳐 정결 의식을 하던 바닥으로 흘러들어 갔습니다. 그때 많은 물이 유입된 남쪽 못의 수면이 출렁거렸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물이 출렁거릴 때 들어가면 치유력이 있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주랑에는 병이 있거나 눈먼 사람, 저는 사람 등의 사람들이 많이 모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한바퀴 돌면서 주요 부분은 살펴본 것 같은데요 4부에서는 기원 70년에 있었던 유대인 반란 당시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공방전을 시간 순서로 장소를 보면서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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